가수 김국환. ©김국환
가수 김국환. ©김국환

김국환은 선천성 백내장으로 아기 때부터 한쪽 눈이 흐릿하게 보이는 상태로 성장했다. 서울맹학교 학창 시절 공부보다는 운동을 좋아해서 중학교 때부터 전국장애인 체전 골볼 선수로 출전하여 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는 악기를 잘 다룬다거나 절대 음감이 있다거나 하는 특별한 음악적 재능은 없었지만 노래를 듣는 것과 특히 부르는 것을 유난히 즐기며 좋아했다.

그러다 학교 후배와 함께 나가게 된 교내 가요제에서 수상을 하며 음악에 대한 열정은 더욱 커져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후배와 KBS장애인가요제에 출전하여 금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음악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03년 ‘좋은이웃’ 이라는 CCM팀에 합류하면서 무대 공연이 많아졌다.

2009년 Mnet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본선에 올라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해 싱글 앨범을 발표하면서 엠슈퍼콘서트라는 방송으로 가요계 정식 데뷔를 하였다. 그 후 ‘더 블라인드(김국환, 이현학, 정명수, 김지호)’라는 팀으로 활동 영역을 넓혀 갔고, 현재 장애인 인식개선 공연을 통해 시각장애 후배들과 교류하면서 가수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더 블라인드 멤버들과 공연중. ©김국환
더 블라인드 멤버들과 공연중. ©김국환

음악으로 성장

1984년 서울 신길동에서 태어난 김국환은 태어날 때 백내장으로 시각장애가 생겼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넘어지면서 다친 다리가 장애로 남게 되었고, 저시력인 어머니, 그리고 다섯살 위인 형도 국환처럼 시각장애가 있다. 온 가족이 장애 문제를 갖고 살고 있지만 가족 모두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국환에게 장애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 일상이 평화로웠다. 10대 시절 음악이 좋아서 여러 노래를 따라 부르며 상념에 잠기곤 했다. 상상 속에서 그는 가수와 연주자를 오고 갔다.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가사와 음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었다. 그렇게 자기 인생은 음악으로 채워질거 같다는 막연한 생각에 행복했다.

신나게 노래 부르며 친구들과 어울린 기억들로 채워진 맹학교 생활이 마쳐질 즈음에는 아쉬움과 함께 미래에 대한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건 여전히 노래라는 생각뿐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대학에 진학했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점 흥미를 잃었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결국 대학을 그만두고, 자연스레 선배들이 활동하고 있는 안마사 일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안마사 일이 고달프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입이 생기기 시작하니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음악에 심취할 수 있는 환경이 돼서 좋았다.

가수 김국환 ©김국환
가수 김국환 ©김국환

설레는 첫 앨범 <안보여>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도 크다. 매년 수많은 노래가 발표되는 상황에서 그는 소위 히트치는 노래를 만들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그 많은 노래 가운데 자신의 생각이 담긴 노래는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국환을 설레게 했다. 그 설레임 덕분에 몇 시간이고 작업실에 틀어박힐 수 있었다.

첫 앨범 <안보여>는 국환에게 의미가 남다르 다. 자신만의 노래로 방송 무대에 서 보고 싶다는 꿈을 이루어 주었기 때문이다. 노래 제목을 보고 개인적인 경험이 담긴 곡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 이 곡은 사랑에 대한 더포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 후 많은 노래를 만들었는데 자살 예방 캠페인을 주제로 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서 ‘더 블라인드’의 활동이 사회 변화를 촉진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남다른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이 노래 또한 ‘더 블라인드’ 멤버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어두운 순간에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멤버들 모두 이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했다.

가장 떨렸던 도전 결혼과 육아

‘더 블라인드’ 밴드 활동을 하며 만든 기획사 직원이던 부인은 그 누구보다 김국환을 잘 이해해 주는 지원자이며, 가까운 동료였다. 그의 결혼 소식을 알리자,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라다가도 곧바로 수긍했다. 연애 생활이 너무 조용해서 결혼 소식이 급작스럽다는 반응이 있었지만 워낙 두 사람이 잘 어울려서 언제 결혼하나 궁금했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를 너무나 소중히 여겼기에 가정을 이루는 과정 하나하나를 조심히 밟아 나갔다. 같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 다. 화목한 가정, 안락한 보금자리, 행복하게 자랄 아이들… 아내는 그 옆에서 언제나 조용히 머물고 있었다. 서로 마음이 잘 맞기도 했지만 결혼 전부터 그의 일상을 도와주고 있었기에 이미 부부나 다름 없었다.

첫딸에 이어 둘째 딸이 태어나서 딸딸이 아빠가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 어느덧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침 시간에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하다. 투정들, 엉뚱한 질문들, 꿈꾼 이야기 등… 여기에 아내의 잔소리가 더해져 집안은 온기를 내뿜는다.

그는 시간이 될 때마다 아이들의 등하교를 함께한다. 아이들은 산만하게 길을 걷다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릴 때가 많다. 그러다가 한 발 뒤에 따라 걷는 그를 보고 방긋 웃고는 손을 잡고 칭얼댄다. 아이들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는 이 순간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어느 봄날 학교에서 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자기들만 아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도 아이들의 리듬에 맞춰 즉흥적으로 콧노래를 불렀더니 아이들은 자기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줄 알고 좋아했다.

일상의 행복

프리랜서로 일했을 당시 생활과 수입은 불규칙했다. 그는 한동안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며 의기소침한 적이 있었다. 눈치 빠른 아내는 평온한 가정을 위해서라며, 그의 역할을 늘려 주었다. 맞벌이하는 아내가 출근 준비를 하는 아침 시간에 그는 아이들의 밥을 챙기고, 등교 준비를 맡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 동안은 예약된 안마사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지인의 작업실에 들러 곡 작업을 도와주거나 노래 연습을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오후 시간이 되면 집에서 숙제를 봐주거나 간식을 만들어 주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아내가 퇴근하면 아침에 만들어 놓은 반찬으로 함께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그 이후부터 본격적인 집안일이 시작된다. 빨래, 설거지, 청소 등 집안일은 함께하는 것이라고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교육했기 때문에 큰아이는 청소기를 돌리고 작은아이는 빨래 개는 것에 익숙했다. 그렇게 모든 가족이 집안일을 하고 나면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그때 그는 아내와 많은 대화를 나눈다.

대중음악 분야의 실연자로 생업을 잇기는 쉽지 않다. 몸소 체험한 사실이다.

처음 음악 분야에 발을 디딜 때는 시각장애를 핸디캡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으로 살기 때문에 오히려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바라는 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예인의 삶이 아니라 노래하는 인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맹학교에서 배운 안마 기술은 그에게 수입을 가져다 준다. 욕심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먹고 살 만한 수준이다.

한동안은 헬스키퍼로 일을 했었다. 헬스키퍼는 기업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고용한 안마사를 지칭하는데, 헬스키퍼를 채용하게 되면 장애인의무고용 인원에 포함된다.그래서 계약직이긴 했지만 비교적 상시 채용이 많아서 헬스키퍼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다.

헬스키퍼를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안마 받기를 미안해하는 사람, 부담스러울 정도로 간식을 잔뜩 안겨 주는 사람, 자신도 아이를 키우고 있다며 육아용품을 선물해 주는 사람 등등. TV에 나왔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 그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오신 분 맞으시죠?”

“네, 오래전인데 저를 알아보시네요?”

“그럼요, 저는 국환 씨 노래 되게 좋아했어요.”

평창동계패럴림픽 축하공연을 준비하며 더 블라인드 멤버들과 ©김국환 
평창동계패럴림픽 축하공연을 준비하며 더 블라인드 멤버들과 ©김국환 

계속 노래를 부른다

그가 ‘나의 어렸을 적 꿈은 노래방 사장이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까르르 웃는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다. 노래를 마음껏 부를 수 있는 노래방은 그의 놀이터였고, 그의 꿈을 키우는 꿈터였고, 대회를 앞두고 연습을 할 수 있는 최상의 교육장이었다.

같은 시각장애가 있는 형은 특수교육을 전공하여 특수교사로 맹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결혼 후 안정적인 생활을 하여 장남으로서 부모님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다. 동생 김국환도 가수로서 이름을 알리고 TV 오디션 프로그 램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때 김국환을 ‘한국의 스티비원더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곡을 주는 작곡가도 있었다. 그래서 김국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과 같은 입장에 있는 분들을 위해서 모든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2010년대는 장애예술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활동 무대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나 김국환은 항상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였다. 시각장애인 콘텐츠를 개발해서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유튜브에 올리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장애인 인식개선 강의를 공연과 함께 기획하여 KBS장애인앵커 1호인 이창훈은 강의를 하고, 김국환은 공연을 하면서 큰 성과를 보았다.

현재 장애인직업교육 강사로 주 40시간 근무를 하고 있지만 지금도 멋진 곡을 만들어 앨범을 내고 무대에 서는 날을 위해 가수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고 있다.

예전에 비하면 사회가 많이 발전했다. 오히려 20대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여 최대한 확대를 하면 흐릿하게나마 형태가 보이고, 텍스트가 바로 음성으로 변환이 되어 점역을 하지 않아도, 누가 읽어 주지 않아도 스스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벌써 아홉 살, 일곱 살이 된 두 딸은 김국환의 보물이다. 가정적으로 안정이 되었기에 앞으로는 더욱 진정성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장애예술인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활동하기에 딱 좋은 시기가 되었다.

김국환은 심호흡을 하며 다시 무대에 서는 꿈을 꾸면서 그날을 위해 열심히 노래를 준비하고 있다.

 

김국환

2006 대구대학교 국어교육과 중퇴

2003 서울맹학교 고등부 졸업

2000 서울맹학교 중학부 졸업

1997 서울맹학교 초등부 졸업

 

2021.12. 책쓰기 코칭지도사 2급 자격증

2021.10. 바리스타 2급 자격증

2003.02. 안마사 자격증

 

2019 전국장애인가요제 1위

2018 제3회 김현식가요제 3위

2018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2015 일본 골든콘서트 3위

2002 KBS장애인가요제 금상

2019 녹차, 추억만들기(김현식가요제 수상 앨범) 참여 2018 더 블라인드 <오늘도> 싱글앨범 2017 6&8 더 블라인드 자살예방캠페인 싱글앨범 2개 2016 더 블라인드, 구혜선 <썼다 지웠다> 싱글앨범 2016 2soo 싱글앨범 <사랑은 원래 잃기만 하는 것>(김국환 피처링) 2015 더 블라인드 <mine> 싱글앨범 2014 더 블라인드 아시아나항공 크리스마스 앨범 2014 더 블라인드 1집 EP앨범 2013 김국환 싱글앨범 <네 바퀴의 꿈> 2012 김국환 3집 싱글앨범 2010 김국환 2집 싱글앨범 2009 김국환 1집 싱글앨범 2009 Mnet 슈퍼스타K 시즌 1 출연 2004 앨범 '좋은이웃 2집' 2003 앨범 ‘좋은이웃 1집’ 등

KBS 제3라디오 ‘내일은 푸른하늘’, KBS ‘사랑의 가족’ 출연 다수

KBS 장애인의 날 행사 출연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 및 축하 공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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