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피츠버그대학교 '배움의 전당(Cathedral of Learning)' 앞에서 김종배 교수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피츠버그에서 다시 만난 ‘배움의 전당’
오전에 데이브 브레인자와 회의를 마치고, 베이커리스퀘어 푸드홀의 ‘시티키친’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각자 핸드폰 앱으로 메뉴판을 보고 식사를 고르고 결제까지 하니 자연스럽게 더치페이가 되었다. 조금 머쓱했지만, “미국이니까!” 편하게 식사했다.
이제 데이브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오후 CMU 회의에 앞서 피츠버그에 오면 꼭 가봐야 하는 곳, 피츠버그대학교와 카네기멜론대학교(CMU)가 있는 ‘오클랜드’ 지역으로 이동했다. 버스는 71D. 오래전 내가 피츠버그에 살 때 새디사이드에서 오클랜드 학교 쪽으로 출퇴근하며 주로 타던 노선이다.
‘내 차가 없어도 그냥 나가서 버스나 전철을 타면 된다.’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휠체어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노선버스가 저상인지 아닌지 앱으로 확인하고, 아니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거나, 가까운 지하철역까지 가는 편이 나을지 계속 판단해야 한다. 이동 하나에도 적지 않은 인지훈련이 필요하다.
문화유산도, 접근성도 포기하지 않은 도시
카네기멜론대학교 멜론연구소 앞에서 김종배 교수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오클랜드에 들어서자 피츠버그대학교의 ‘배움의 전당(Cathedral of Learning)’, 하인즈 메모리얼 채플, CMU 멜론연구소가 모여 있는 거리가 펼쳐졌다. 카네기 도서관과 자연사박물관, 고색창연한 학교 건물들이 이어지고, 협곡을 지나면 카네기멜론대학교가 나온다. 그야말로 카네기 제국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거대한 부를 축적한 부호들이 미래를 위해 앞다투어 교육에 투자했고, 그 결과 이런 문화유산과 교육시설이 남았다. 그것이 미국을 세계 1등 국가로 만든 원동력 중 하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멜론연구소 정면에는 62개의 웅장한 이오니아식 석회암 기둥이 늘어서 있다. 건물 전체는 파르테논 신전을 본떠 설계되어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한다. 이 건물은 영화 ‘배트맨’에서 고담 시청으로 등장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전 같은 이 건물은 거대한 돌계단과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휠체어 사용자는 어떻게 들어갈까. 건물은 후면과 측면에 접근 가능한 출입구를 설치해 휠체어 접근성을 보장한다. 정면의 웅장한 계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접근성은 별도의 동선을 통해 확보한 것이다.
아름다운 채플 안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문
하인즈 메모리얼 채플 내부를 가득 채운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사진=김종배 교수)길을 건너면 43층 높이의 석조건물 ‘배움의 전당’이 푸른 잔디밭 뒤에 서 있다. 그 왼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배당 중 하나로 꼽히는 ‘하인즈 메모리얼 채플’이 있다.
한국에서는 유독 ‘오뚜기’에 고전하고 있지만, 세계인이 먹는 ‘하인즈 케첩’의 식품왕 하인즈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이 신고딕 양식의 걸작은 내부를 가득 채운 22m 높이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천상의 빛을 뿜어낸다.
정문에는 계단이 있어 휠체어 사용자는 올라갈 수 없다. 하지만 휠체어 표시 안내판을 따라가면 묵직한 수공예 단조 철물과 짙은 붉은색의 아름다운 오크나무 문이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건물의 예술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편리하게 개조 설치된 고급 엘리베이터가 있다.
예배가 없던 시간이었지만, 벽면에 4,200여 개의 파이프가 숨겨진 세계적 명기의 파이프오르간이 은은히 연주되고 있었다. 성경 속 인물과 이야기를 정교하게 새긴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이 들어오고, 오르간 연주가 공간을 채웠다. 잠깐, 천상의 평온을 경험한 듯했다. 이곳에서 결혼식을 위해 1년 이상 기다린다는 말도 이해가 됐다.
자동문 버튼 하나에 담긴 철학
하인즈 채플을 나와 잔디밭을 가로질러 43층의 거대한 석조 성당 같은 ‘배움의 전당’으로 향했다.
중앙 출입구에는 접혔다 펼쳐지는 플립형 자동문이 양쪽에 설치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는 휠체어 마크가 붙은 앉은키 정도 높이의 작은 기둥이 있다. 휠체어 마크 아래에는 길고 넓은 알루미늄판이 붙어 있다. 이것이 장애인을 위한 전동문 오픈 스위치다.
왜 이렇게 스위치가 크고 길까. 나는 열 손가락을 모두 쓰지는 못하지만, 이두박근과 어깨근육은 사용할 수 있어 팔을 휘둘러 스위치를 손으로 ‘툭’ 칠 수 있다. 그러나 손을 그렇게 뻗지 못하는 장애인도 많다. 그분들이 이 학교의 학생이거나 교수일 수 있고, 방문객일 수도 있다.
피츠버그대학교 '배움의 전당(Cathedral of Learning)' 출입구 중앙에 설치된 장애인용 자동문 오픈 스위치. 역사적 건축물의 외관을 보존하면서도 휠체어 이용자의 접근성을 확보한 사례로, 확대 화면을 통해 긴 알루미늄 버튼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피츠버그대 홈페이지 갈무리)이들은 일반 조이스틱 외에도 호흡 스위치, 헤드 컨트롤러, 턱 조이스틱 등 특수 컨트롤러로 전동휠체어를 운전한다. 그런 분들도 휠체어를 스위치 앞으로 이동시킨 뒤 발이나 발판으로 스위치를 ‘차듯이’ 눌러 문을 열 수 있다.
100여 년 전에 지어진 역사적 건축물이지만, 문화재적 외관을 보존하면서도 ADA 기준에 맞도록 접근 가능한 출입구를 설치한 전형적인 사례다. 나는 기분 좋게 스위치를 툭 치고, 내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게 학교야?”라는 감동
중앙 홀에 들어서자 “어메이징!”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5층 높이의 거대한 실내 홀에는 돌기둥이 솟아 천장에서 고딕식 교차 아치를 이루고 있었다. 곳곳에는 묵직한 오크나무 테이블과 가죽의자, 거대한 벽난로가 배치되어 해리포터의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연상케 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학생들이 실제로 공부하고 있었다. 학기말고사 기간이라 학교는 무료 음료 바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25년 전, 내가 처음 피츠버그에 왔을 때도 이곳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학교야?” 이런 곳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강한 동기부여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을 나올 때는 반대편 출입구를 이용했다. 그곳에도 자동문이 있었고, 사람이 접근하면 센서가 감지해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내가 공부할 때도 이곳을 지나면 늘 자동문이 열리는 ‘철커덕’ 소리에 놀라곤 했다.
피츠버그대학교 배움의 전당 내부 Commons Room에서 권 연구원이 의자에 앉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한국 대학의 접근성을 다시 생각하다
최근 우리 학교 교목실에서 연락이 왔다. 대강당에서 채플수업을 하는데 휠체어를 탄 강사가 오신다며, 강단에 올라갈 경사로나 리프트가 없어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나도 예전에 대강당 채플수업에서 강의한 적이 있었고, 학교 교회와 체육관에서도 휠체어 탄 연사가 오실 때 연구실의 경사로를 총동원해 강단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운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보조공학 수업을 들은 4학년 과 대표 학생과 함께 대강당에 가서 강단 높이와 앞 공간을 측정했다. 며칠 뒤 교목실에서 연락이 왔다. 총무처에 이야기했더니 전동리프트를 임대해 설치하겠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매년 ‘보조공학’ 수업에서 학생들이 ‘장애인 등 편의시설 증진법’에 따른 접근성 체크리스트를 활용해 학교 각 건물의 접근성을 조사하게 하고, 그 결과를 총무과에 전달해왔다. 하지만 개선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다.
내가 학교에 교수로 부임할 때 학교는 연구실과 교수회관 주거공간에 자동문을 설치해주고, 백운관 주 강의실인 121호 계단강의실 출입구 턱을 경사로로 바꾸고, 계단식 좌석 일부를 부수어 휠체어 파킹 좌석을 만들어주었다. 참 고마웠다.
그러나 이미 내가 오기 전 우리 단과대에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출석하는 학생이 있었다. 그 학생을 만나고 나서는 부끄러웠다.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고 말해온 내가 창피했다.
교육권은 접근성에서 시작된다
우리나라도 이제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 여러 차례 개정되면서, 각급학교가 특수교육대상자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구, 학습보조기, 보조공학기기 등의 설비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학 장애학생지원센터 운영지원사업에도 장애 대학(원)생의 학습활동에 필요한 보조기기 지원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등록금 인상은 계속 동결되어 있고, 미국처럼 기부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한국의 사립대학들이 예산 압박 속에서 이런 곳에 투자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장애인고용공단이 장애인의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보조공학기기 지원을 확대하듯, 교육부도 장애인의 교육에 필요한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
다시 피츠버그로 돌아오자. 학문의 전당을 나와 포브스 애브뉴를 따라 대학가를 걸었다. 한국에서는 가게나 식당을 들어갈 때 먼저 ‘턱이 있나, 없나’를 살펴야 한다.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거의 없다. 오래전 유학 시절 이용하던 가게들을 지나며 감회가 촉촉이 젖어왔다.
왜 미국은 학교의 장애인 접근성에 이렇게 진심일까. 왜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급 학교 건물에도 예산을 들여 정성껏 편의시설을 설치하는 것일까.
미국도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미국 장애인 인권운동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리는 에드 로버츠와 쥬디스 휴먼도 대학에서부터 차별과 맞서며 독립생활운동을 이끌어갔다.
그렇다. 대학교와 초중고, 학교부터 접근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장애인의 자립에 있어 교육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와 한국의 교육 접근성 해결을 위해, 연희전문학교를 창립하며 한반도에 서구 고등교육의 문을 열고 평생을 헌신했던 언더우드 선교사. 그의 한국 선교를 핵심적으로 지원했던 도시가 바로 피츠버그였다.
그분을 이곳 피츠버그에서 다시 소환하고자 한다. 그가 141년 전처럼 지금 한국에, 연세대학교에 다시 온다면 무엇부터 하실까. AI일까, 반도체일까, 바이오일까. 그보다 먼저, 뒤처져 있는 한국 교육 현장에서 장애인의 교육권을 넓히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