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원의 백련지(상)와 홍련지(하) 풍경
세미원의 백련지(상)와 홍련지(하) 풍경

휠체어 명소 탐방기 [36] - 양평 세미원과 두물머리 ①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날, 물과 꽃이 자아내는 고결한 풍경을 찾아 경기도 양평의 세미원(洗美苑)으로 향했다. 마침 세미원은 일 년 중 가장 화려하게 피어나는 연꽃을 마주할 수 있는 '연꽃문화제'가 한창이었다. 지난 6월 26일 시작된 연꽃문화제는 8월 16일까지 계속된다.

세미원은 경의중앙선 양수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어 수도권에서 전철로 접근하기도 쉽다. 세미원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교통접근성과 함께 정보접근성도 매우 우수한 편이다. 홈페이지에는 일일 개화상황까지 사진으로 제공하고 있어 연꽃이 만개한 시기를 선택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세미원을 모두 둘러보고 바로 옆의 배다리를 건너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로 이어진다. 두물머리는 드라마·영화 등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며, 웨딩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은 자연명소다.

금년 10월에는 세미원과 두물머리 일원에서 경기도 정원박람회가 열린다. 그때부터는 볼거리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觀水洗心 觀花美心)”는 그 의미를 되새기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음속 묵은 번뇌가 하나둘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으로 기행을 시작한다.

세미원 안내도(출처: 세미원 누리집)
세미원 안내도(출처: 세미원 누리집)

입구의 개찰구를 통과하면 이색적인 모습의 4층 건물 하나가 눈에 확 들어온다. 세미원이 자랑하는 국내 유일의 연꽃박물관이다. 사각의 벽돌 건물과 육각형 연꽃 문양을 형상화한 건물이 서로 맞물려 서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이 건물 앞에 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건물 자체의 웅장함보다도 연꽃을 모티프로 한 외벽의 섬세한 장식이다. 짙은 회색 벽돌과 목재기둥이 만들어 내는 묵직한 분위기 속에서, 외벽 곳곳을 채운 연꽃 문양은 마치 한 폭의 자수처럼 건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차분한 회색빛 건축물 위에 피어난 연꽃은 화려함을 드러내기보다 은은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며, 세미원이 지닌 정원의 철학을 건축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층층이 길게 뻗은 처마는 현대적인 건물이면서도 전통 한옥의 깊은 처마선을 연상시킨다. 수평으로 반복되는 선들은 건물을 더욱 안정감 있게 만들고, 단단한 기둥은 연못 위에 피어난 연꽃의 줄기처럼 묵묵히 공간을 떠받치고 있다. 현대와 전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마치 오랜 세월 이 자리에 있었던 건축물처럼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룬다.

건물을 감싸고 있는 조경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인공적으로 다듬은 흔적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려 한 듯 작은 바위들이 곳곳에 놓여 있고, 그 사이사이로 계절꽃과 초록빛 식물들이 자유롭게 자라난다. 키 작은 야생화는 수줍게 꽃을 피우고, 잎이 풍성한 관목들은 서로 어깨를 맞댄 채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품어낸다. 정원은 화려하게 꾸며졌다기보다 자연이 스스로 완성한 풍경처럼 편안하게 다가온다.

이 연꽃박물관은 단순히 전시를 위한 건물이 아니라, 세미원 여행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관문과도 같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부터 방문객은 이미 연꽃의 세계 속으로 들어와 있다. 외벽에 피어난 연꽃은 정원으로 이어지고, 정원의 초록은 세미원의 연못으로 이어지며, 결국 사람의 마음속에도 한 송이 연꽃을 피워 놓는다.

세미원 입구에서 만나는 연꽃박물관의 이색적인 건물 모습과 주변 풍경
세미원 입구에서 만나는 연꽃박물관의 이색적인 건물 모습과 주변 풍경
연꽃박물관 건물 내부 전시공간의 모습
연꽃박물관 건물 내부 전시공간의 모습

1층은 카페로 꾸며져 있고, 2층은 상설전시, 3층은 기획전시 공간이다. 엘리베이터도 갖추고 있어서 이동약자도 접근이 용이하다. 2층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인 연꽃의 인문학적 여행이 시작된다. '연꽃은 우주를 담고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부터 시작해 삼국시대 기와, 조선시대 회화, 도자기, 그리고 일상 민속품에 이르기까지 우리 선조들의 삶에 깊숙이 투영된 연꽃 문양들을 전시하고 있다.

세미원을 모두 둘러본 뒤 나가는 길에 박물관에 들러 1층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쉬고, 2층과 3층의 전시 공간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아니면 박물관에서 연꽃에 관한 인문학적 지식을 먼저 얻은 뒤 세미원의 연꽃을 둘러본다면 아는 만큼 더 많은 것이 보일 것이다.

박물관을 나오면 세미원 내부공간으로 들어가는 불이문이 반긴다. 불이문이란 사찰을 방문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출입용 건물인데, 속세와 불국토를 잇는 경계이자 모든 존재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불교의 철학을 상징한다. 이곳에는 원형으로 된 통로에 태극 문양을 꾸몄다. 세미원의 불이문은 태극 문양을 통해 사람과 자연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철학을 표현했다고 한다.

불이문으로 들어가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울을 건너면 한반도 모양으로 조성된 연못, 국사원이다. 연못에는 수련들이 활짝 피어있고, 주변으로는 소나무와 무궁화가 나라사랑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국사원으로 건너가는 길 앞에는 폭 1m 정도의 개울이 있고, 맑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개울 사이에 놓인 돌다리 하나를 딛고 건너야 하는데 필자처럼 휠체어 등을 이용하는 이동약자는 접근 자체가 어렵다. 징검다리 위로 평평한 석재 상판을 하나 걸쳐 놓거나 그 옆으로 아치형 작은 다리라도 설치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간절하다. 국사원 주변의 보행로 또한 일정 간격의 판석들이 노면에 심한 요철을 일으켜 휠체어나 유아차, 실버카 등의 통행을 어렵게 한다.

세미원 내부로 들어가는 불이문
세미원 내부로 들어가는 불이문
국사원으로 건너가는 통로와 주변의 보행로는 노면의 요철과 돌다리로 인해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국사원으로 건너가는 통로와 주변의 보행로는 노면의 요철과 돌다리로 인해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한반도 모습을 형상화 한 국사원, 주변의 보행로는 노면의 요철현상으로 휠체어 등의 통행이 어렵다.
한반도 모습을 형상화 한 국사원, 주변의 보행로는 노면의 요철현상으로 휠체어 등의 통행이 어렵다.

국사원을 통하지 않고도 개찰구 건물 출구를 통해서 세미원 내부로 들어갈 수는 있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100여 미터의 보행로를 이용하여 계속 들어가면 ‘장독대분수’가 나온다. 장독대분수는 국사원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위치하고 있어 어느 쪽으로 들어가던지 이곳에서 합류하여 본격적인 연꽃 투어를 할 수 있다.

세미원의 대표적인 명물인 장독대분수는 수십 개의 장독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운데, 그 뚜껑 위로 시원한 물줄기가 하늘을 향해 힘차게 뿜어져 나온다. 초여름의 후텁지근한 공기를 단숨에 날려버리는 분수대의 물보라 덕분에 정원 산책길이 한결 청량해진다.

이어서 발길을 옮긴 곳은 페리기념연못이다. 이곳은 세계적인 연꽃 연구가인 '페리 슬로컴(Perry D. Slocum)' 박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못이다. 그가 직접 개발하고 기증한 특별한 품종의 연꽃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일반적인 연꽃보다도 더 화려하고 독특한 빛깔을 자랑한다. 붉은빛과 노란빛이 은은하게 섞인 연꽃들이 물 위를 화가가 그린 캔버스처럼 수놓고 있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만든다.

페리기념연못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 좋은 곳에 정자 하나가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정자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정자 안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전국의 수많은 관광지나 공원에서 만나는 정자 중에 휠체어가 그대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이곳의 정자는 전국 지자체에서 관광지나 공원을 조성할 때 꼭 본받아야 할 모범 사례다. 이러한 개념이 왜 국사원 진입로와 그 주변 보행로에서는 반영되지 않았는지 못내 아쉽다.

세미원 내부로 들어가는 다른 출입통로
세미원 내부로 들어가는 다른 출입통로
장독대분수의 풍경, 역시 주변의 노면은 요철현상이 심하다.
장독대분수의 풍경, 역시 주변의 노면은 요철현상이 심하다.
페리연못과 무장애 시설을 갖춘 정자형 조망대
페리연못과 무장애 시설을 갖춘 정자형 조망대

페리연못을 지나면 세미원의 하이라이트이자 연꽃문화제의 진수가 펼쳐지는 백련지와 홍련지에 도착한다. 백련지에는 선비처럼 단아한 흰 연꽃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하얀 꽃잎이 넓게 펼쳐진 초록빛 연잎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민 모습은 마치 속세를 초월한 듯 고고하다. 홍련지는 백련지와는 대조적으로 정열적이고 화사한 분홍빛 물결이 장관을 이룬다. 한낮의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반짝이는 홍련들은 연꽃문화제의 열기를 그대로 대변하는 듯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다.

백련지와 홍련지 사이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물속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세족대가 있고, 세족대 주변의 나무 그늘 아래로 벤치 등 휴식 공간이 있다. 그곳에는 세미원을 돌다가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이 앉아서 홍련지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휴식 공간과 조망 공간으로 이어지는 휠체어 접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 지형 구조상 이동약자에 대한 조금의 관심만으로도 휠체어 통로 설치가 가능해 보여서 더욱 안타깝다.

홍련지 옆으로는 ‘빅토리아수련연못'이 이국적인 풍경으로 길게 수면을 반짝인다. 그 옆으로 열대수련원과 호주수련원 등 이국적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물 표면에 바짝 붙어 피어나는 아기자기한 수련들은 연꽃과는 또 다른 섬세한 매력을 보여준다. 특히 용두당간(용머리 장식의 긴 장대) 조형물에서 용이 품어내는 물줄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한여름의 더위를 날려버리는 것 같다.

이어진 시설은 유산곡수다. 구불구불하게 만들어진 수로를 따라 맑은 물이 흐른다. 신라 귀족들이 술잔을 띄워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포석정을 떠올리면서 바쁘게 살아온 일상을 돌아보고 한 박자 쉬어가는 여유를 가져본다.

발을 씻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세족대의 모습
발을 씻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세족대의 모습
홍련지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무 그늘, 그러나 통로의 단차 하나가 휠체어 통행을 가로막는다.
홍련지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나무 그늘, 그러나 통로의 단차 하나가 휠체어 통행을 가로막는다.
빅토리아수련연못의 모습
빅토리아수련연못의 모습
유산곡수의 풍경
유산곡수의 풍경

세족대 앞 길 건너에도 연꽃을 품은 연못은 계속된다. 연못의 둑길은 남한강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세심로다. 세심로를 계속 이동하면 사랑의 연못, 모네의 정원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대표작인 '수련이 가득한 정원'을 모티브로 조성된 정원이다. 서양 명화의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연꽃문화제를 찾은 커플들에게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최고의 데이트 코스이자 포토존으로 통한다.

모네의 정원 너머로는 거대한 호수가 펼쳐진다.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하는 주요 상수원인 팔당호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의 수자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모네의 정원을 뒤로하면 자연스레 되돌아 나가는 길이다. 그러나 세미원은 마지막까지도 발걸음을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세심로의 반대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나오다 보면 담장 너머 한옥 한 채가 조용히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입구에는 '약속의 정원, 세한정(歲寒庭)'이라는 안내판이 길을 안내한다.

이곳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서화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불후의 걸작이자 국보인 '세한도(歲寒圖)'를 정원의 형태로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 뜻깊은 공간이다.

세한정과 두물머리가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려 한다.

호주수련연못과 열대수련연못 등이 있는 풍경
호주수련연못과 열대수련연못 등이 있는 풍경
세심로와 사랑의 연못 모네의 정원
세심로와 사랑의 연못 모네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