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명소 탐방기 [39] -  영주 소수서원과 선비세상 ①

소수서원과 선비촌 입구에 선비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영주선비상이 있다.Ⓒ소셜포커스
소수서원과 선비촌 입구에 선비의 고장임을 상징하는 영주선비상이 있다.Ⓒ소셜포커스

선비의 고장 영주로 들어서자 풍경부터 달라진다. 멀리 소백산 자락이 겹겹이 펼쳐지고 그 아래 들판과 마을이 느긋하게 자리 잡았다. 이번 휠체어 명소 탐방의 목적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과 그 주변의 선비 관련 관광시설이다. 이곳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2025년도 열린관광지로 지정한 곳이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으로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세운 곳인데, 처음 이름은 백운동서원이었다.  그후 퇴계 이황(1501 ~ 1570)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고, 1550년 명종 임금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과 어필을 내렸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다.

2019년에는 다른 8곳의 서원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고 여행하는 나에게 문화유산의 역사만큼 중요한 것이 있다. ‘휠체어를 타고 어디까지 들어갈 수 있을까?’ 오래된 사찰이나 향교, 서원, 고택을 찾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문화유산도 계단과 문턱 앞에서 휠체어가 멈추면 나에게는 절반밖에 볼 수 없는 문화유산이 된다. 그런 점에서 소수서원은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원 앞에 이르자 오래된 소나무들이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도 있고 세월의 무게를 견디느라 굽은 나무도 있다. 사람의 얼굴에 살아온 세월이 새겨지듯 소나무도 자신의 몸에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휠체어를 천천히 움직인다. 조금 더 들어가니 물소리가 들려온다. 죽계천이다.

사람은 떠나고 나라는 바뀌었지만 물은 여전히 흐른다. 죽계천 가까이에는 경렴정이 있고 건너편에는 취한대가 자리한다. 퇴계 이황이 자연의 푸르름을 즐긴다는 뜻을 담아 이름 붙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소수서원이라는 어필 현판이 걸린 강학당 내부의 모습 Ⓒ소셜포커스
소수서원이라는 어필 현판이 걸린 강학당 내부의 모습 Ⓒ소셜포커스
소수서원 강학당의 외부 모습 Ⓒ소셜포커스
소수서원 강학당의 외부 모습 Ⓒ소셜포커스
서원의 역사를 연 소수서원 삼대인물의 영정(안향, 주세붕, 이황)
서원의 역사를 연 소수서원 삼대인물의 영정(안향, 주세붕, 이황)
소수서원 입구 경렴정에서 바라본 죽계천과 취한대 Ⓒ소셜포커스
소수서원 입구 경렴정에서 바라본 죽계천과 취한대 Ⓒ소셜포커스

서원 안으로 들어가면 강학당과 문성공 안향의 사당인 문성공묘, 성현들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등 여러 건물을 만나게 된다.  소수서원의 시작에는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고려시대 유학자 안향(1243 ~ 1306)이 있다.

그는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나라 수도인 연경(베이징)에 머물면서 주자의 저술을 접하고 감탄하였다. 그는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직접 손으로 베껴 쓰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의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후기에는 오랜 무신집권과 불교의 폐단, 권문세족의 횡포, 관리들의 부패 등으로 사회적·사상적 혼란이 깊어졌다. 이에 위기극복을 위한 새로운 사상이 필요했다. 

이 시기에 안향을 통해 들어온 성리학은 이제현을 거쳐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 이를 계승한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정도전 등 개혁사상을 가진 신진사대부가 대거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조선 건국에 참여하면서 조선 500년의 사상적 기반으로 이어진다.

안향은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 교과서에도 역사를 빛낸 위인으로 등장했다. 그는 사재를 털어 섬학전이라는 장학기금을 조성하여 나라의 미래를 위한 교육에 힘썼으며, 노비 중에서도 똑똑한 자는 학문을 가르쳐 인재로 길러냈는가 하면, 미신을 타파하는 데 앞장서는 등 선구자적 교육자이자 사상가였다.

주세붕은 안향 사후 237년 만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이황은 그 서원을 국가가 인정하는 교육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이 세 사람의 공적이 시대를 넘어 이어졌다는 점에서 소수서원은 단순한 옛 교육시설이 아니라 한국 성리학과 교육 제도의 발전 과정을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안향은 바로 이곳 순흥 출신이다. 지금의 순흥은 영주시의 한 면 단위에 불과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현재의 영주시와 봉화군 일부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하던 순흥도호부가 있었다. 수령인 도호부사는 종3품의 고위 관리로, 군수(종4품)나 현감(종6품)보다 꽤 높았다.

안향의 사당인 문성공묘 Ⓒ소셜포커스
안향의 사당인 문성공묘 Ⓒ소셜포커스
성현들의 영정이 소장된 영정각의 모습 Ⓒ소셜포커스
성현들의 영정이 소장된 영정각의 모습 Ⓒ소셜포커스
영정각 내 중앙부에는 송나라 대유학자 주자(주희)와 그의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의 영정이 있다. Ⓒ소셜포커스
영정각 내 중앙부에는 송나라 대유학자 주자(주희)와 그의 주자학을 도입한 안향의 영정이 있다. Ⓒ소셜포커스
소수서원에 관련한 사료가 전시된 사료관의 모습 Ⓒ소셜포커스
소수서원에 관련한 사료가 전시된 사료관의 모습 Ⓒ소셜포커스

그랬던 순흥에 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이 단종을 지지하다 유배를 왔다. 금성대군은 유배 중에도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속 추진하다가 1457년 계획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른바 정축지변이다. 이 사건은 영월에 유배 중이던 단종의 생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순흥도호부는 폐지되고 많은 부민들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으면서 풍기군과 영천군, 봉화현 등에 나뉘어 편입되었다. 안향의 고향이었던 지금의 순흥면은 당시 풍기군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얼마 전 엄청난 인기를 몰고 왔던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중후반부에는 정축지변에 관련된 스토리가 등장한다.

금성대군(이준혁 연기)이 당시 순흥부사와 합세하여 단종 복위를 위해 군사를 모으고 한양으로 진격할 준비를 하는 모습과 영월에 유배된 단종에게 서찰을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결국 한명회(유지태 연기)에게 발각되고, 영화 후반부 단종의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는 빌미가 된다. 다만, 여기서 단종과 금성대군의 서찰 교환 등 일부 스토리는 영화적 각색이다. 즉 기록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소수서원에서 불과 300여 미터 지점에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금성대군 신단이 자리잡고 있다. 소수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바로 보이는 곳이다.

금성대군의 꿈은 좌절되었고, 순흥도호부는 사라졌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땅에는 주세붕이 세운 국내 최초의 서원이 들어섰다. 왕조의 권력투쟁으로 상처받았던 순흥이 학문과 교육의 고장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 것이다.

단종복위운동과 소수서원은 역사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은 없다. 그러나 소수서원에 이미 무너진 학문을 이어 다시 닦는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을 보면 묘한 여운이 남는다.

강학당 앞에서 수백 년 전 젊은 유생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누군가는 큰 소리로 글을 읽고 누군가는 스승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어려운 글귀 하나를 놓고 친구끼리 논쟁을 벌이다 죽계천으로 나가 머리를 식힌 학생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공부에는 오늘날 우리가 조금 잊고 있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성리학에서 공부는 지식을 많이 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닦아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마침 강학당에서 경전 읽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선비 차림을 하고 공부하는 옛 모습을 재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잘살기 위해 참 많은 것을 공부한다. 좋은 대학과 직장, 자격증과 소득을 위한 공부도 필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를 배우는 데는 얼마나 시간을 쓰고 있을까.

소수서원 주변의 소나무숲 Ⓒ소셜포커스
소수서원 주변의 소나무숲 Ⓒ소셜포커스
서원 내 여러 건물들의 모습(사진=소수서원 홈페이지)
서원 내 여러 건물들의 모습(사진=소수서원 홈페이지)
소수서원과 그 주변의 안내도(사진=영주시청 홈페이지)
소수서원과 그 주변의 안내도(사진=영주시청 홈페이지)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처형된 금성대군 신단의 모습(사진=네이버 로드뷰)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처형된 금성대군 신단의 모습(사진=네이버 로드뷰)

그러다 휠체어 여행자의 눈에 또 하나의 특별한 모습이 들어왔다. 

전통건축물을 휠체어로 찾아다녀 본 사람이라면 한 뼘도 안 되는 문턱이 얼마나 큰 장벽인지 안다. 사찰과 향교, 고택은 물론이고 새로 복원하거나 재현한 한옥에도 문턱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 한옥이니 문턱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필자 역시 다른 지역의 여러 서원을 탐방했지만 아예 정문부터 출입을 금지당했던 아픔을 겪은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소수서원은 달랐다. 정문이든 측문이든 휠체어의 이동을 가로막는 높은 문턱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특히 후문과 샛문의 경우는 건축당시 부터 문턱을 설치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물론 소수서원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비교 대상에 비해서는 매우 양호한 수준이고, 고건축 문화재도 무장애 시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을 보존한다는 것과 사람의 접근을 막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원형 문화재에 문턱이 있다면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이동식 경사로 같은 방법을 찾으면 된다. 더욱이 새롭게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전통 건축물이라면 ‘옛 건물이니까’라는 이유만으로 없어도 되는 문턱까지 재현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문화재는 바라보기만 하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다. 오늘의 사람들이 찾아가 보고 느끼고 그 의미를 다음 세대에 전할 때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그렇다면 장애인도 노인도 어린이도 그 역사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소수(紹修)’라는 두 글자가 오늘날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것은 이어받되 부족한 것은 고쳐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것. 옛 모습을 지키면서도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게 하는 것. 그것 역시 우리 시대의 ‘소수’가 아닐까.

누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문턱 하나, 휠체어 이용자에게 문턱 하나는 500년의 역사를 눈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그 문턱 하나가 없다면 휠체어도 500년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소수서원은 인터넷 홈페이지가 잘 정리되어 있어 정보접근성도 우수하다. 여기에 접속하면 사진 등으로 게시된 각종 정보를 알아볼 수 있다.

소수서원에서 나는 선비정신만 만난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문화유산도 얼마든지 ‘모두에게 열린 문화유산’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만났다.

문턱이 없어 이동약자 출입에 편리한 후문의 모습 Ⓒ소셜포커스
문턱이 없어 이동약자 출입에 편리한 후문의 모습 Ⓒ소셜포커스
문턱없이 설치된 각종 시설별 출입문 Ⓒ소셜포커스
문턱없이 설치된 각종 시설별 출입문 Ⓒ소셜포커스
소수서원은 정문에도 문턱이 없고, 고도차 해소를 위한 경사로가 잘 갖춰져 있다. Ⓒ소셜포커스
소수서원은 정문에도 문턱이 없고, 고도차 해소를 위한 경사로가 잘 갖춰져 있다. Ⓒ소셜포커스
휠체어 이용자 등 관광약자 출입이 자유로운 소수서원 주출입구 Ⓒ소셜포커스
휠체어 이용자 등 관광약자 출입이 자유로운 소수서원 주출입구 Ⓒ소셜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