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 교수가 국내에서 운전하고 있는 휠체어 탑승용 특수 개조 차량. 운전은 그에게 이동의 자유뿐 아니라 남편과 아빠로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되찾아줬다. 사진=김종배 제공
김종배 교수가 국내에서 운전하고 있는 휠체어 탑승용 특수 개조 차량. 운전은 그에게 이동의 자유뿐 아니라 남편과 아빠로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되찾아줬다. 사진=김종배 제공

HERL에서 진행하는 RAMP 연구를 살펴보는 것은 이번 미국 여행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였다. 로리 쿠퍼 교수와 호르헤 교수에게 직접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박상미 박사다.

박상미 박사는 한국에서 우리 대학 작업치료학과 학사·석사·박사를 마치고 BK 교수로 근무하다 HERL 포닥으로 온 지 2년 정도 됐다. 이번 방문에서도 연구실 투어부터 호르헤 교수와의 2차 미팅까지 세심하게 챙겨줬다.

2년 전 피츠버그 방문 때는 더 큰 도움을 받았다. 귀국 비행기가 새벽 출발이었는데, 늘 이용하던 28X 공항버스가 그 시간에는 운행하지 않았다.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택시나 셔틀도 찾기 어려웠다.

결국 박 박사가 HERL의 조나단 듀발 교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듀발 교수 역시 나와 같은 경수 5번 손상에 의한 사지마비 장애인이다. 그는 전동휠체어를 탄 채 직접 운전할 수 있도록 개조한 저상 미니밴을 몰고 왔다.

그가 전동휠체어를 탄 채 운전석으로 들어가 차를 몰고, 나는 그 뒤에 휠체어를 탄 채 앉았다.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오래전 피츠버그에서 운전하던 모습이 그대로 겹쳐 보였다.

박사학위만큼 간절했던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것’

휠체어 이용자의 승하차를 위해 경사로가 설치된 장애인 이동지원 차량. 차량 내부를 개조해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사진=방송영상 캡처/김종배 제공
휠체어 이용자의 승하차를 위해 경사로가 설치된 장애인 이동지원 차량. 차량 내부를 개조해 휠체어가 진입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사진=방송영상 캡처/김종배 제공

25년 전 미국에 올 때 내게는 세 가지 목표가 있었다. 박사학위를 받는 것, 직접 운전하는 것, 그리고 척수손상 환자를 위한 신경재생 연구의 성과를 보는 것이었다.

신경재생에 대한 기대는 당시 현실의 벽 앞에서 접었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박사학위는 4년 만에 받았고, 운전면허는 그보다 몇 달 뒤 미국에 온 지 4년 반 만에 취득했다. 그 과정은 길었다.

재활의학과 주치의의 평가를 시작으로 운전재활 전문가의 평가를 받았고, 이후 펜실베이니아주 OVR(Office of Vocational Rehabilitation·직업재활국)의 지원 대상자가 됐다.

OVR은 내가 운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필라델피아의 전문 재활병원까지 연결했다. 아내와 나의 항공료와 숙박비, 식비까지 지원했다. 손으로 가속과 브레이크, 핸들을 조작하는 여러 보조장치를 시험했다. 그러나 첫 도전은 실패였다.

피츠버그 스틸러스 경기장 옆 대형 주차장에서 휠체어를 운전석에 고정하고 운전을 시작했지만, 회전할 때마다 손이 조작장치에서 빠졌다. 위험했다. 운전재활 전문가는 이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낙심했다. 하지만 OVR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두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내가 도로 위를 달렸다

김종배 교수가 미국 유학 4년 반 만에 취득한 생애 첫 운전면허증. 중증장애를 딛고 직접 운전할 수 있게 된 순간은 그에게 특별한 감격이었다. 개인정보는 비식별 처리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쓰담미디어 편집
김종배 교수가 미국 유학 4년 반 만에 취득한 생애 첫 운전면허증. 중증장애를 딛고 직접 운전할 수 있게 된 순간은 그에게 특별한 감격이었다. 개인정보는 비식별 처리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쓰담미디어 편집

다음 선택은 기계식 장치가 아닌 완전 전자제어 운전 시스템이었다. 피츠버그에서 두 시간가량 떨어진 존스타운의 전문 운전학교에서 다시 평가를 받았다. 당시 펜실베이니아에서 완전 전자제어 교육차량을 갖춘 곳이었다.

그마저 바로 시작할 수 없었다. 앞선 교육생의 사고로 차량이 파손돼 새 차를 마련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차가 준비됐다. 나는 하이럼 G. 앤드류 센터 기숙사에서 머물며 2주 동안 집중적으로 운전교육을 받았다.

꿈만 같았다. 두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내가 자동차를 몰고 실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마지막 날에는 심사관을 태우고 도로주행 시험을 치렀다. 평행주차까지 무사히 마쳤다.

“합격!”

면허증을 받아들자마자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나 합격했어!”

대학에 붙었을 때도, 카이스트에 합격했을 때도 하지 않았던 ‘합격 세리머니’였다. 수동휠체어조차 스스로 밀 수 없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부터 쉽지 않았던 내가 이제 자동차를 운전하게 된 것이다.

‘김 박사’에서 ‘김 기사’가 되다

김종배 교수가 특수 운전 보조장치를 이용해 차량을 조작하고 있다. 손의 움직임이 제한된 중증장애인도 맞춤형 조향·가속·제동 장치를 통해 직접 운전할 수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김종배 교수가 특수 운전 보조장치를 이용해 차량을 조작하고 있다. 손의 움직임이 제한된 중증장애인도 맞춤형 조향·가속·제동 장치를 통해 직접 운전할 수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면허를 땄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내가 운전할 차가 필요했다.

토요타 시에나 미니밴을 구입해 1·2열 바닥을 약 27cm 낮췄다. 전동휠체어를 탄 채 운전석에 들어갔을 때 시야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핸들과 가속·브레이크는 전자제어 방식으로 바꾸고 전동경사로와 휠체어 고정장치 등도 설치했다.

차가 완성된 뒤에는 운전재활 전문가가 피츠버그까지 와서 사흘 동안 실제 운전을 점검했다. 동네 도로부터 고속도로까지 달리며 안전성을 확인한 뒤에야 모든 과정이 끝났다.

이제 정말 내가 드라이버가 됐다. 그 변화는 단순히 이동거리가 길어진 것이 아니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나는 집에서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아내는 나 때문에 한국에서 운전면허까지 따야 했고, 미국에서도 늘 나를 태우고 다녔다. 그런데 이제 내가 운전할 수 있었다.

장을 보러 갈 때도, 가족과 외식할 때도, 교외로 나갈 때도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무엇보다 딸아이의 방과 후 활동을 위한 ‘라이드 서비스’를 내가 맡을 수 있게 됐다.

소프트볼, 배구, 농구, 조정, 크로스컨트리….학교가 끝나면 운동하러 가는 딸을 데려다주고, 다시 데리러 갔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아빠가, 이제 딸을 태워다 주는 아빠가 된 것이다.

집에서는 박사보다 기사가 훨씬 쓸모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김 박사’보다 ‘김 기사’라는 말이 더 좋다. 아내가 가끔 “김 기사”라고 부르면 괜히 어깨가 올라간다. 자존감도 쑥쑥 올라간다.

미국에서 만든 차, 한국에서도 35만km를 달렸다

김종배 교수가 미국에서 운전교육을 받은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의 하이럼 G. 앤드류 센터(Hiram G. Andrews Center). 김 교수는 이곳에서 2주간 완전 전자제어 차량을 이용한 운전교육을 받은 뒤 도로주행시험에 합격했다. 사진=펜실베이니아주 노동산업부 영상 캡처/김종배 제공
김종배 교수가 미국에서 운전교육을 받은 펜실베이니아주 존스타운의 하이럼 G. 앤드류 센터(Hiram G. Andrews Center). 김 교수는 이곳에서 2주간 완전 전자제어 차량을 이용한 운전교육을 받은 뒤 도로주행시험에 합격했다. 사진=펜실베이니아주 노동산업부 영상 캡처/김종배 제공

나를 ‘김 기사’로 만들어준 것은 OVR이었다. OVR은 운전면허 취득 과정은 물론 특수차량 개조 비용까지 지원했다. 미국에서 운전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 지원 덕분에 교수로서 출퇴근과 출장의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은 직업 경쟁력만이 아니었다.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가족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한번은 편도 7시간 거리인 뉴욕을 하루 만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타던 그 차를 한국으로 가져왔다. 13년 동안 35만km를 달린 뒤 전자장치 노후로 결국 폐차했다. 하지만 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다시 카니발을 구입해 바닥을 낮추고 전동경사로와 휠체어 고정장치를 설치했다. 미국에서 사용하던 전자제어 시스템은 국내에서 수입·설치·유지하기 어려웠다.

결국 동네 카센터의 ‘자동차 장인’ 사장님과 머리를 맞댔다. 부품을 구하고 필요한 장치를 직접 만들며 전자식을 기계식으로 바꿨다. 그렇게 만든 차로 지금까지 다시 29만km를 달렸다.

앞으로 자율주행차가 보편화되면 차를 바꾸고 싶다. 하지만 전기차는 바닥에 배터리가 있어 휠체어 운전자의 시야를 맞추기 위한 저상 개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도 장애인에게는 또 다른 장벽이 생기는 셈이다.

이동을 지원했더니 한 사람의 역할이 달라졌다

박상미 박사 이야기에서 시작해 운전 이야기까지 멀리 왔다. 박 박사는 현재 HERL에서 휠체어 사용자가 도로와 건물의 접근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용 보드게임을 연구하고 있다.

게임을 통해 지역사회에서 휠체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살펴야 하는지 경험하게 하는 방식이다. 설명을 듣다가 우리 윷놀이판도 이렇게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번 피츠버그 방문에서 다시 깨닫는다. 장애인에게 이동을 지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디까지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운전할 수 있게 되자 교수로서 갈 수 있는 곳이 넓어졌고,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아내를 태우고, 딸을 데려다주며 남편과 아빠로서 가족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겼다.

OVR이 내게 준 것은 자동차 한 대가 아니었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서 ‘누군가를 태워주는 사람’으로 역할을 바꿀 기회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김 박사’보다 ‘김 기사’라는 말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