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명소 탐방기 [38] - 양평 세미원과 두물머리 ③
두물머리 끝에 있는 두물경 조형물세한정(歲寒庭)의 문을 나서는 순간, 한옥 처마 끝에 걸려 있던 고요가 서서히 뒤로 물러난다. 조금 전까지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전해 주는 절개와 인내의 정신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문밖으로 나오는 순간 세상은 다시 바람과 햇살이 흐르는 현실로 돌아온다.
세한정이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공간이라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길은 자연이 사람을 품는 공간이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세미원의 상징인 배다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단순한 부교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 다리가 품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강 위에 떠 있는 수십 척의 배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물은 쉼 없이 흐르지만 다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휠체어가 배다리 위에 오르는 순간 작은 진동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콘크리트 바닥에서 느껴지던 단단한 감촉 대신 물 위에 떠 있는 특유의 탄력이 바퀴를 통해 몸으로 전달된다.
'지금 나는 강 위를 걷고 있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배다리 아래에서는 북한강 물살이 남한강을 향해 천천히 흘러간다. 잔잔한 물결은 햇빛을 받아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고, 작은 물새들이 물살을 가르며 지나간다.
배다리 한가운데쯤 이르면 양평의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오른편으로는 북한강이 깊고 푸른 물빛을 간직한 채 흘러온다. 설악산과 화천, 춘천을 지나 수많은 계곡을 품었던 물이다. 왼편으로는 남한강이 여주와 충주의 들판을 적시며 흘러온다. 두 강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이곳에서 아무런 다툼도 없이 하나가 된다.
사람도 그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친다. 서로 다른 생각과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더라도 결국은 더 큰 강이 되기 위해 만날 수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울 것이다. 배다리를 건너면 드디어 두물머리가 시작된다.
이곳의 배다리는 조선 후기 정조가 현륭원(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 행차를 위해 정약용에게 설계를 맡겨 한강에 설치했던 배다리를 재현한 것이다. 선박 44척을 이어 다리 형태로 연결했다. 정조의 효심과 다산의 지혜를 상징하는 이 배다리는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중요한 통로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정조의 명으로 완벽한 주교(배다리)를 설계해 낸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생가(여유당)와 묘지는 배다리에서 직선으로 불과 2Km의 거리다. 두물머리 남단에서 팔당호 건너편 능내리에 실학박물관과 다산생태공원, 여유당 등이 함께 어우러진 다산유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오늘의 배다리를 건너면서 다산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엉뚱한 연상이 아니다.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배다리
세미원과 두물머리를 잇는 배다리의 상판과 측면의 모습
역사 속의 배다리, 조선 정조때의 한강주교환어도(리움 박물관 소장)과 화성원행의궤도에 실린 한강배다리 그림(서울대 규장각 소장)세한정에서 나와 배다리 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돌 장식을 하고 서 있는 조형물 하나가 발걸음을 세운다. 다산 정약용이 오랜 유배가 풀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과거 강진 유배 시절 다도(茶道)와 학문으로 우애를 다졌던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글이 소개되어 있다.
두물머리 경치가 너무 좋다고 설명하면서 이곳에 와서 강물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시를 짓고 함께 살자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조형물에는 "초의선사여 양평에 삽시다"라고 제목이 붙어 있다. 편지글 아래에는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두물머리 일대의 풍경을 그린 독백탄도(獨栢灘圖)가 그려져 있다.
'두물머리.' 이름부터 참 아름답다. 한자로는 양수리(兩水里). 두 개의 물이 만나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어디에도 강이 합쳐지는 곳은 많지만, 이처럼 두 강이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삶과 문화, 역사를 함께 품어 온 장소는 흔치 않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이곳에서 만나 비로소 하나의 한강이 된다. 그리고 그 한강은 서울을 지나 서해까지 흘러간다.
생각해 보면 수도 서울의 젖줄도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셈이다. 서울 사람들이 마시는 물도, 도시를 가로지르는 한강도 모두 두물머리에서 첫걸음을 시작한다. 여기에 국내 최대규모의 상수원인 팔당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물머리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명줄이 태어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두 줄기의 큰 물줄기가 마침내 하나의 숨결로 포개어지는 곳, 두물머리의 아침은 자욱한 물안개로 하루를 여는 경우가 많다. 북한강의 맑은 기운과 남한강의 묵직한 흐름이 서로의 어깨를 보듬는 이곳에 서면, 번잡했던 일상의 소음은 어느새 강바람의 여운 속에 흩어져 버린다.
두물머리의 상징은 아무래도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아닐까 싶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됐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 나무를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령한 '도당나무'로 여겨 매년 도당제를 지내오고 있다.
유배에서 풀려난 다산이 초의선사에게 두물머리에서 살자고 권유하는 편지글을 소개한 조형물
두물머리의 상징인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물머리 일부 구간을 둘러싼 기와담장의 운치와 시원한 나무그늘
기와담장 너머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팔당호가 보인다.생태교육센터 곁을 지나 잔디마당이 내어주는 흙길 어귀에 섰다. 지도 위 나침반의 깃촉처럼 서서 서쪽과 남쪽으로 뻗어나간 오솔길을 바라본다. 발밑으로는 잘게 부서진 흙과 이슬 머금은 풀잎의 서늘한 감촉이 온몸으로 번져온다. 왼쪽으로는 푸른 잔디마당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너른 품을 열고 있고, 고개를 살짝 돌리면 버드나무습지와 강들정원으로 향하는 잔잔한 샛길들이 마치 실타래처럼 엉켜 있다.
발걸음을 천천히 버드나무습지 방향으로 옮긴다. 물가에 길게 늘어뜨린 수양버들의 가지들은 수면 위를 간지럽히듯 살랑거리고,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마치 한 폭의 은은한 수묵화 속 여백을 닮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연둣빛 잎사귀들이 사각거리며 강물이 들려주는 오랜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이따금씩 습지 안쪽 갈대숲 사이에서 물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라 고요한 수면 위에 둥근 파문을 그린다.
이어지는 두물머리 강들정원의 산책로는 계절의 색채를 오롯이 품고 있다. 두렁길을 따라 거닐다 보면 야생화들이 저마다의 수줍은 빛깔로 길섶을 밝혀준다. 인위적인 화려함 대신 강변의 흙과 물, 바람이 함께 빚어낸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다. 강변을 따라 마련된 데크길에 잠시 멈추어 서서 넓게 펼쳐진 강을 바라본다. 햇살이 안개를 뚫고 내려앉기 시작하자,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는 윤슬이 강물 위를 춤추듯 수놓는다.
길은 자연스럽게 두물머리 나루터와 수령 수백 년의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이어진다. 과거 남한강 수로를 오가던 황포돛배와 수많은 뱃사람의 쉼터였던 나루터는 이제 고즈넉한 정취만을 간직한 채 멈추어 있다. 물가에 닻을 내린 돛배의 고요한 실루엣과 묵묵히 세월을 견뎌낸 웅장한 느티나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위로를 건넨다. 강 건너 겹겹이 포개진 능선들은 옅은 푸른빛으로 물러서며 두물머리의 운치를 한층 더 깊게 만든다.
두물머리 나루터와 나룻배의 모습
두물머리 무장애 산책로
시원하게 뚫린 두물머리 무장애 산책로산책길 곳곳에서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웨딩사진을 찍는 신혼부부. 아이 손을 잡고 걷는 가족. 혼자 삼각대를 세워 풍경을 담는 사진가. 그리고 조용히 강을 바라보는 노인. 두물머리는 누구에게나 다른 의미를 선물한다.
누군가에게는 여행지이고, 누군가에게는 추억이며, 누군가에게는 쉼이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돌아보는 공간이다. 나에게 두물머리는 '속도를 내려놓는 장소'였다.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하다 보면 목적지보다 이동 과정이 더 중요해질 때가 많다.
경사가 있는지, 턱은 없는지, 화장실은 이용 가능한지, 길은 안전한지. 늘 그런 것부터 살피게 된다. 하지만 두물머리에서는 그런 걱정이 조금씩 사라진다. 풍경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 그것만으로도 여행은 성공한 셈이다. 접근성이란 결국 시설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풍경을 선물하는 권리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한 바퀴를 모두 돌아 다시 배다리 쪽으로 향한다. 햇살은 어느새 조금 기울기 시작했고 강물은 아침보다 더 짙은 푸른빛을 띤다. 세미원의 연꽃도 오후의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졌다.
세미원의 세한정은 절개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두물머리는 화합을 가르쳐 주었다.
추사의 세한도가 혹독한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우정을 이야기했다면, 두물머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존재들이 만나 더 큰 세상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준다. 여행은 결국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삶을 다시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휠체어 이용자가 둘러본 두물경의 모습과 자연의 소재를 이용한 조형물
무장애 편의시설이 잘 갖춰진 휴게시설과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지만 휠체어 진입로를 막아 놓은 시설이 대비되는 두물머리 상가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