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아도 보이는 피츠버그의 길

피츠버그대학교 배움의 전당에서 ‘피프스애브뉴’를 따라 멜론연구소를 조금 더 지나가면, 피츠버그에 단 한 곳밖에 없는 한국 식품점 ‘서울식품’이 있다.

그 앞에서 오른쪽으로 길을 꺾으면 내가 주로 이용하던 PNC뱅크가 있는 사우스크레이그 스트리트로 들어선다. 그 길에는 카네기멜론대학교(CMU)의 작은 연구소들과 카페, 인도음식점, 타이음식점 등 맛집들이 이어지고, 곧 ‘포브스애브뉴’를 만나게 된다.

좌회전해 포브스애브뉴를 따라가면 기찻길이 가로질러 지나는 좁지만 꽤 깊은 정션(Junction) 협곡 위 다리가 나온다. 그 다리만 지나면 오른쪽으로 카네기멜론대학교 메인캠퍼스가 시작된다.

이 협곡에는 지금도 화물 운송 기차가 다닌다. 19세기 말 피츠버그가 철강 산업으로 대호황을 누리던 시절, 이 철도는 피츠버그 남쪽 모농가헬라강가의 제철소들과 북쪽 알레게니강 주변 물류망을 하나로 연결하던 중요한 노선이었다.

유학 시절 휠체어를 타고 수없이 오가던 길이다. 눈을 감아도 보일 듯하다.

6성급 호텔 같은 장애아동 학교

서부펜실베이니아맹아학교(WPSBC) 전경. 1894년 메리 솅클리 여사가 기증한 부지에 세워진 이 학교는 중증복합장애를 가진 시각장애아동에게 교육과 치료, 돌봄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이다. 사진=WPSBC 홈페이지 갈무리·김종배 교수 제공
서부펜실베이니아맹아학교(WPSBC) 전경. 1894년 메리 솅클리 여사가 기증한 부지에 세워진 이 학교는 중증복합장애를 가진 시각장애아동에게 교육과 치료, 돌봄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기관이다. 사진=WPSBC 홈페이지 갈무리·김종배 교수 제공

베이커리스퀘어에서 오클랜드 대학가로 버스를 타고 올 때 처음 내렸던 교차로가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반대편으로 가면 노스벨필드애브뉴가 되고, 그 길을 한 블록만 더 가면 왼쪽에 오래되고 화려한 석조건물과 화사한 현대식 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의 환타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건물이 서부펜실베이니아맹아학교, WPSBC(Western Pennsylvania School for Blind Children)이다.

내가 피츠버그에 있을 때, 신촌 세브란스병원 재활병원의 어린이재활병동에서 미국의 장애학교와 장애아동 재활시설을 견학하고자 손님들이 온 적이 있다. 안내를 해드리기 위해 우리 학과 교수진의 소개를 받아 알게 된 곳이다.

나는 먼저 아내와 답사를 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 복도를 걸어가는데, 이곳이 학교인지 6성급 호텔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바닥은 에폭시를 입힌 듯 반짝반짝 빛났고, 공간은 너무나 깨끗하고 평온했다.

무엇보다 중복장애를 가진 시각장애아동들에게 최상의 재활치료와 교육을 제공하는 모습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교실에서는 중증장애학생 한 명을 위해 치료사들과 특수교사가 함께, 혹은 번갈아 가며 치료와 교육, 돌봄을 제공하고 있었다.

한 아이를 위한 다학제 팀

이 학교 교육의 핵심 철학은 ‘통합 다학제 케어’다. 한 명의 아동에게 특수교사(TVI), 물리치료사(PT), 작업치료사(OT), 언어치료사(SLP), 방향감각·이동훈련사(O&M), 행동치료사, 전담 간호사 등이 하나의 아동 중심 다학제 팀으로 배정된다.

치료실로 이동해 짧은 시간 치료만 받고 돌아오는 방식이 아니다. 교실 수업과 식사, 이동, 감각 놀이 같은 일상 활동 자체가 치료 과정이 된다.

단순한 학술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아동이 스스로 표현하고, 신체 기능을 유지하며, 환경을 인식하고, 가능한 한 자립에 가까워지도록 돕는 일이다. 이 학교는 이를 위해 개별화된 기능적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점자, 보조공학기기 활용, 잔존 감각 활용, 사회성 훈련 등도 아동의 인지·신체 수준에 맞춰 제공된다.

WPSBC는 1894년 메리 솅클리(Mary Schenley) 여사가 기증한 부지에 세워졌다. 피츠버그 특유의 클래식한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이 학교는, 당시 시각장애인들이 사회로 진출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타자기 타이핑, 점자 타자, 속기, 가구 제작, 수공예 등 직업교육을 중요하게 다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증복합장애 아동 케어’로 전면 전환하면서 내부 시설과 부속 건물이 현대화됐다. 휠체어 이동, 대형 의료 장비, 수중 치료 풀, 감각 자극 시설 등을 수용하기 위해 현대적인 공간들이 대거 증축됐다.

서부펜실베이니아맹아학교(WPSBC)의 현대식 스카이브릿지. 학생들이 눈, 비, 추위에 구애받지 않고 기숙사와 치료실, 교실 사이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사진=WPSBC 홈페이지 갈무리·김종배 교수 제공
서부펜실베이니아맹아학교(WPSBC)의 현대식 스카이브릿지. 학생들이 눈, 비, 추위에 구애받지 않고 기숙사와 치료실, 교실 사이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사진=WPSBC 홈페이지 갈무리·김종배 교수 제공

특히 ‘스카이브릿지(Skybridge)’는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눈, 비, 추위 등 궂은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기숙사와 치료실, 교실과 건물 사이를 휠체어로 안전하고 쾌적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유리 통창으로 만들어진 현대적 작품이었다.

모든 것이 놀라웠다.

부모 부담 0원, 자본주의의 또 다른 얼굴

더 놀라운 것은 재정 구조였다. 아동 한 명당 연간 수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재정과 1대1에 가까운 인력이 투입되지만, 학부모가 부담하는 비용은 0원, 무료라는 것이다. 수업료, 치료비, 기숙사비는 물론 등하교 통학버스 비용까지 부모에게 청구되지 않는다.

아동의 연간 학비, 1인당 약 1억 2천만 원에서 2억 5천만 원 상당의 비용은 펜실베이니아주 교육부와 해당 아동의 거주지 교육청이 비율을 나눠 전액 지급한다. 최첨단 시설 개보수, 감각 정원 관리, 첨단 보조공학기기 도입 등은 WPSBC 자체 재단과 지역사회, 기업, 개인 자선가들의 민간 기부로 충당된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이런 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닐까.

우리 동네의 자랑이 된 재활교육기관

휠체어 리프트가 장착된 스쿨버스에 학생이 탑승하고 있다. 피츠버그의 장애아동 재활교육 현장에서는 학생 한 명의 안전한 이동을 위해 별도의 차량과 인력이 세심하게 배치된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그때 세브란스재활병원 방문팀에게 소개했던 또 하나의 장애아동 재활교육기관이 있다. 내가 살던 집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피츠버그어린이재활원, The Children’s Institute of Pittsburgh이다.

우리 동네에 있어서 아내와 산책하며 자주 지나쳤다. 한번은 건물 옆 주차장에 학생들을 태우고 가려는 스쿨버스 두 대가 서 있었다. 그중 한 대는 조금 작은 버스였다.

그 작은 스쿨버스에는 휠체어 리프트가 장착되어 있었다. 기사는 익숙한 듯 휠체어를 탄 학생을 인계받아 리프트로 차에 태웠다. 휠체어를 고정하고 안전벨트를 착용시킨 뒤, 그 아이 한 명만 태우고 출발했다.

스쿨버스는 말 그대로 여러 명의 학생을 태우는 버스다. 그런데 이 버스는 작았고, 휠체어 사용 학생 한 명만을 위해 움직였다.

모퉁이 사거리에는 교통경찰 모양의 모자를 쓰고 노란색 반사 조끼를 입은 여성 주민이 있었다. 그는 STOP 패들 표지판을 들고 아이들의 안전한 등하교를 돕고 있었다. 장애학생을 태운 버스가 안전하게 도로에 진입하도록 안내하는 모습이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장애아동 재활교육시설이 자기 동네에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기부와 봉사가 만든 지역의 레거시

피츠버그어린이재활원(The Children’s Institute of Pittsburgh) 전경. 이 기관은 의료·행동 재활치료와 조기 개입, 가족 상담 등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지역 기반 장애아동 재활교육기관이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피츠버그어린이재활원(The Children’s Institute of Pittsburgh) 전경. 이 기관은 의료·행동 재활치료와 조기 개입, 가족 상담 등을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지역 기반 장애아동 재활교육기관이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피츠버그어린이재활원은 의료적·행동적 재활치료에 강하다. 특히 자폐 아동을 위한 행동치료(ABA), 영유아 0~3세 조기 개입 프로그램, 장애아동 가정의 위탁·입양 연계, 부모 상담 등 가족 단위의 통합 복지 체계를 갖추고 있다.

외래 진료와 다양한 프로그램이 함께 운영되는 종합 복지 거점이기 때문에, 지역 주민과 대학생, 봉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다양하다. 외래 치료 보조, 놀이 봉사, 행사 기획 등으로 주민들은 이곳을 “우리 동네 센터”처럼 친숙하게 느낀다.

미국인들은 자신이 사는 동네, 네이버후드(Neighborhood)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크다. 특히 “우리 지역사회가 장애가 있거나 취약한 아이들을 최상의 환경에서 포용하고 돌본다”는 사실은, 주민 스스로 이 시설을 큰 자랑거리로 여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1902년 ‘Home for Crippled Children’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기관은 설립 당시부터 지역 이웃들과 자선가들의 기부, 봉사로 성장해왔다. 그래서 수세대에 걸쳐 “우리 할머니도, 우리 어머니도 여기서 봉사했다”는 가문 단위의 봉사 내력이 이어지기도 한다.

카네기멜론대학교를 향해 협곡 위 다리를 건너며 생각했다.

우리 대한민국도 이제는 이런 레거시를 만들어가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