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MMP 연구용 시제품이 전동휠체어에 장착된 로봇 팔로 음료수를 집어 사용자 쪽으로 가져오고 있다. RAMMP는 전동휠체어에 로봇 팔과 센싱 기술, Physical AI를 결합해 이동과 손작업을 함께 지원하는 차세대 보조공학 플랫폼이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HERL로 향하는 여섯째 날
오늘은 미국에서의 6일째 되는 날이다. 이번 출장의 가장 중요한 미션인 ‘로보틱 이동 및 손작업 보조 플랫폼’, RAMMP(Robotic Assistive Mobility & Manipulation Platform) 프로젝트를 살펴보기 위해 HERL(Human Engineering Research Laboratories)을 방문한다.
RAMMP는 미국 보훈청(VA)과 피츠버그대학교(PITT)가 공동 설립·운영하는 세계적 재활공학 연구기관 HERL이 미국 보건복지부(HHS) 산하 ARPA-H로부터 수주한 대형 과제다. 총 연구비는 최대 4,150만 달러, 한화 약 550억 원 규모로, 5년간 연평균 약 110억 원이 투입된다.
ARPA-H는 미국 보건복지부가 국방성(DoD)의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을 벤치마킹해 만든 조직이다. DARPA가 군사용 인터넷과 GPS 등 인류 문명을 바꾼 기술을 만들어낸 것처럼, 과감한 연구개발 방식을 바이오·의학 분야에 접목하려는 취지다.
암과 난치병을 정복하겠다는 야심 찬 목표도 담겨 있다. 국방부의 ‘D’를 보건복지부의 ‘H’로 바꾸어 ARPA-H라는 이름의 국가 차원 바이오 딥테크 프로젝트가 탄생한 셈이다. 한국 보건복지부도 몇 년 전 똑같은 이름의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나의 스승, 로리 쿠퍼
김종배 교수가 HERL 연구진을 대상으로 연세대학교에서 진행 중인 IoT 기반 주거환경 개선 가이드라인 연구를 소개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로리 쿠퍼 교수가 손을 턱에 대고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최근에는 로리 쿠퍼 교수를 미국 피츠버그에서나, 세계적 재활공학기기 전시회 ‘레하케어’가 열리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거의 매년 만난다. 나의 스승이자 같은 척수장애인 동료이며 친구인 그는, 나를 피츠버그대학교로 이끌어주고 응원해 준 인생의 은인이다.
로리 쿠퍼 교수는 세계 재활공학계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휠체어 낙하·충격 테스트, 주행 내구성, 배터리 안전 기준 등 휠체어 성능과 안전에 관한 국제 규격 제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수동휠체어 추진 시 가해지는 힘을 측정해 개인 맞춤형 처방을 가능하게 한 세계 표준 임상·연구 장비 ‘스마트 휠’도 개발했다.
김종배 교수가 2022년 독일 뒤셀도르프 ‘REHACARE’에서 로리 쿠퍼 교수와 함께한 모습. 로리 쿠퍼 교수는 세계적 재활공학 석학으로, 당시 세미나 특강을 맡았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높낮이가 다른 도로와 연석, 자갈길, 계단을 스스로 감지하고 바퀴 위치와 수평을 제어하는 지능형 전동휠체어 로봇 ‘MeBot’, 전기 대신 압축 공기를 동력으로 사용해 물속과 수영장, 놀이공원에서도 안전하게 탈 수 있는 ‘PneuChair’, 휠체어에서 침대·변기·자동차 시트로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돕는 스마트 로봇 팔과 이승 장비 연구도 그의 대표 성과다.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오른 재활공학자
나 역시 ‘원격재활’이라는 새로운 재활 영역의 초석을 놓는 데 기여했고, 재활 로봇 중개연구센터를 만들어 한국의 재활 로봇 연구 활성화에 기틀을 마련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제1회 Cybathlon 대회의 전동휠체어 장애물 경주 분야에 참여해 로리 쿠퍼 팀과 겨루기도 했다. 장애인과 노인 가정의 IoT 보조기기 설치 가이드라인을 정립하는 등 나름 많은 일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로리 쿠퍼 교수는 두 번 더 세상을 놀라게 하며 나를 기죽이고 있다.
그는 2023년 미국 특허청에 의해 미국 국립 발명가 명예의 전당(National Inventors Hall of Fame, NIHF)에 헌액됐다. 토머스 에디슨,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라이트 형제, 니콜라 테슬라 등 인류의 삶을 바꾼 발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김종배 교수가 피츠버그대학교 회의실에서 RAMMP 공동 연구책임자인 호르헤 교수 연구팀과 Physical AI 적용 방향을 논의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파트너 대학과 기업의 역할, NVIDIA와 Meta 등 플랫폼 기업과의 협력 방식이 주요하게 다뤄졌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휠체어와 장애인 보조공학 분야 발명가로서는 최초이자 독보적인 영예다. 특히 그는 스스로 척수손상을 입은 하반신마비 장애인으로서 자신과 동료 장애인들의 문제를 기술로 해결해왔다. 산업용, 군사용, 거대 IT 기술 중심으로 조명받던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서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보조공학 기술이 최고 수준의 국가적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전동휠체어에 Physical AI를 접목한 RAMMP 프로젝트로 또 하나의 대형 연구과제를 수주했다.
나도 뛰어야겠다!
나도 2년 전부터 비슷한 프로젝트를 구상해왔다. 다학제 연구회를 만들고, 세미 휴머노이드 돌봄 로봇, 휠체어 기반 휴머노이드 로봇 등 Physical AI 기반 로봇 휠체어와 돌봄 로봇의 개념을 정립해 국가기관에 기술수요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리 쿠퍼 교수가 한 발짝 먼저 가고 있다. 하지만 이번만은 나도 양보할 수 없다. 나도 뛰어야겠다. 그래서 집을 나서면 전동휠체어의 기본 속도 세팅을 거북이에서 토끼로 바꾼다. 씽씽!
RAMMP에는 피츠버그대학교 HERL 연구팀을 비롯해 CMU, 코넬, 노스이스턴, 퍼듀 등 여러 대학과 ATDev, KINOVA, LUCI 등 보조공학 기술 기업들이 참여한다. NVIDIA와 Meta 같은 Physical AI 개발에 필요한 플랫폼 기업들과의 협력도 당연히 진행되고 있다.
NVIDIA의 Isaac Sim과 Isaac Lab, Meta의 SAM 계열 기술은 미국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연구실들이 Physical AI 연구개발을 위해 이제는 외면할 수 없는 플랫폼이다. RAMMP 프로젝트에서도 핵심 연구 기반으로 활용되고 있다.
다시 만난 HERL의 사람들
김종배 교수가 피츠버그대학교 HERL 연구진들과 함께한 모습. HERL은 휠체어와 이동 보조공학, 재활 로봇 분야의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RAMMP 프로젝트를 통해 전동휠체어와 로봇 팔, Physical AI를 결합한 차세대 보조공학 플랫폼을 연구하고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HERL에서는 로리 쿠퍼 교수와 그의 부인이자 동료 교수인 로지 쿠퍼 교수, 이제는 다들 교수가 된 후배 연구진들, 그리고 연세대 제자로 이곳에서 포닥을 하고 있는 박상미 박사와 오랜만에 반가운 재회의 시간을 보냈다.
로리의 따뜻한 미소와 포옹, 늘 쾌활한 로지의 빅 허그로 인사를 나눴다. 이어 MeBot, PneuChair, BigArm, Transfer Wheelchair, QoLT 프로젝트 때 만들었던 스마트키친 등을 둘러보며 동행한 제자 권 연구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몇 차례 업그레이드된 MeBot 휠체어에는 키노바 로봇 팔과 여러 개의 RGB 카메라가 부착돼 있었다. RAMMP의 첫 번째 연구용 프로토타입이었다. 로리 쿠퍼 교수의 지시로 연구진들이 나와 설명하려 했지만, 거의 매년 봐온 장비라 어떻게 업그레이드됐는지만 간단히 들었다.
몇 년 전 박사과정생이나 포닥이었던 친구들이 이제는 거의 모두 교수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그래, 이제 나도 은퇴할 나이가 되었으니 당연하지!” 미국에 와서 세월이 살 같음을 다시 실감했다.
RAMMP의 핵심은 Physical AI
턱을 오르고 내려올 수 있도록 개발된 지능형 전동휠체어 로봇 MeBot의 시승 장면. MeBot은 높낮이가 다른 지형과 연석을 감지하고 바퀴 위치와 수평을 제어해 안전한 이동을 돕는 로리 쿠퍼 교수 연구팀의 대표 성과 중 하나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사실 RAMMP의 핵심은 Physical AI다. Physical AI는 결국 AI, 즉 소프트웨어다. 하드웨어는 그동안 많이 봐왔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크게 새롭지 않았다.
그래서 RAMMP의 공동 연구책임자(Co-PI)인 호르헤 교수와 회의실에서 따로 만났다. 그는 피츠버그대학교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노트북을 펴고 다른 파트너 대학과 기업들의 역할, NVIDIA와 Meta 등과의 협력 방식에 대해 질문했고 설명을 들었다.
로리 쿠퍼 교수는 이번에도 친절하게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가 맛있는 점심을 사주었다. 베이커리스퀘어 푸드코트에는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한식 비빔밥과 일식 메뉴도 보였다. 나는 좋아하는 피시앤칩스, 생선과 감자튀김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K-휠체어 로보틱스를 꿈꾸며
이제 돌아가면 ‘로봇 팔이 부착된 전동휠체어라는 로봇 시스템’의 기계적 연구와 함께, 이 기계가 어떻게 사용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환경을 인지하며, 분석하고 이해한 뒤 행동계획을 수립하고 수행하게 할지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그 핵심이 바로 Physical AI다.
휠체어에도 AI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전동으로 움직이는 모든 장애인 보조기기와 돌봄 기기는 피지컬 AI로 무장해 지능행동체로 바뀔 것이다.
피시앤칩스의 남은 감자튀김을 잘근잘근 씹으며 다짐했다. RAMMP를 넘어서는 K-휠체어 로보틱스, 이제는 우리가 만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