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 교수가 피츠버그대학교 HERL에서 로리 쿠퍼 교수로부터 ‘SHRS 50주년 기념 우수동문상’ 트로피를 전달받고 있다. 이 상은 2020년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COVID-19 팬데믹으로 시상식이 열리지 못했고, 6년 만에 HERL에서 약식 시상식으로 이어졌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6년 만에 다시 열린 시상식
로리 쿠퍼 교수와 점심을 마치고 HERL 연구소로 돌아온 뒤, 나에게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COVID-19 팬데믹 속에 묻힐 뻔했던 피츠버그대학교 보건재활과학대학(SHRS) ‘50주년 기념 우수동문상’ 시상식을 약식으로나마 진행하게 된 것이다.
사실 이 시상식은 6년 전에 열렸어야 했다. 2019년 말, 피츠버그대 SHRS로부터 내가 2020년 SHRS 50주년 기념 우수동문상 재활과학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곧 시상식 초청장을 보내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COVID-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모든 일정은 멈췄다. 나 역시 감염과 격리, 마스크와 이동 제한의 시간을 지나며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던 올해 초, SHRS 동문 관리 담당자인 Maddy가 링크드인(LinkedIn)을 통해 연락해왔다. 사무실 이사 중 내 트로피를 발견했고, 꼭 전해주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4월 말 피츠버그에 갈 예정이니 직접 받겠다고 답했다.
이번 출장 중 전날 오클랜드에 들러 SHRS 건물에서 트로피를 먼저 수령했다. 그리고 2020년 당시 재활과학기술학과장이었던 로리 쿠퍼 교수에게 약식으로나마 시상식을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쿠퍼 교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HERL과 VA, PITT 로고가 새겨진 포토월 앞에 HERL 식구들이 모였다. 그렇게 6년 늦은 ‘SHRS 50주년 기념 우수동문상’ 시상식이 열렸다. 내가 받는 상의 시상식을 내가 준비한 셈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충분히 뜻깊었다.
SHRS, 재활과학을 학문으로 세운 곳
SHRS는 1960년대 후반부터 보건의료와 재활을 하나의 학문적 조직으로 통합해온 선구적 모델 중 하나다. 특히 Rehabilitation Science와 Rehabilitation Technology를 대학의 핵심 학문으로 발전시켜왔다.
현재 SHRS에는 보조·재활공학, 청각학, 의사소통과학 및 장애, 언어병리학, 작업치료학, 물리치료학, 의지·보조기학, 재활상담학, 보건의료정보학, 영양학, 응급의학, 의사보조학, 스포츠의학 등 다양한 전공이 있다.
U.S. News가 평가하는 SHRS의 전문직 프로그램 5개 가운데 4개는 미국 Top 10에 들어 있다. 특히 작업치료학(OT)은 2026년 현재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재활과학기술(RST) 분야는 평가 대상이 아니지만, 세계 최고 수준임을 자타가 공인한다.
SHRS는 오랫동안 옛 건물인 포브스 타워에 세 들어 살았다. 그러다 드디어 대학 전용 건물을 갖게 됐다. 재활과학기술학과는 베이커리 스퀘어에, OT와 PT는 브리지사이드 포인트에 있지만, SHRS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최초의 건물이 생긴 것이다.
새 건물과 Healthy Home Lab
피츠버그대학교 보건재활과학대학(SHRS) 새 건물 전경. SHRS는 보건의료와 재활, 재활과학기술을 통합적으로 발전시켜온 미국의 대표적 교육·연구기관이다. 사진=최용경 교수 제공트로피도 찾고, 보건의료정보학과 최용경 교수도 만날 겸 SHRS 새 빌딩을 방문했다. 새 건물은 포브스애브뉴에서 언덕길로 한 블록 올라가고, 피프스애브뉴에서 다운타운 쪽으로 한 블록 더 가면 나타나는 유리 건물이다.
건물은 높은 곳에 있고 외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전망이 좋았다. 창가에는 학생들이 공부하거나 쉴 수 있는 테이블이 많이 놓여 있었다. 최용경 교수와 그 창가 테이블에 앉아 새 건물을 둘러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 교수는 컴퓨터과학을 전공했고, 현재 보건의료정보학과 교수로 있다. 최근 SHRS에 생긴 HHL(Healthy Home Lab)에서 최신 IoT 의료기기와 스마트기기, 노인과 장애인이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스마트 보조기기를 테스트하고 실증하며 데이터를 수집·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김종배 교수가 Healthy Home Lab에서 최용경 교수, 문광태 박사와 IoT 보조기기와 스마트 주거환경 연구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HHL은 실제 주택 환경에서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기술을 테스트하는 연구 공간이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나도 최근 3년간 집안 환경을 제어할 수 있는 IoT 스마트기기의 ‘노인 및 장애 유형별 적용 가이드라인 연구’를 수행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개발한 IoT 보조기기, IoT 의료기기, 돌봄 로봇 등의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미국 가정환경 실증연구를 함께 추진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HHL은 SHRS 옛 건물 바로 옆에 있다. 지하 1층과 지상 1·2층, 층당 약 50평 규모의 미국 중산층 주택이다. 노부부가 살다가 세상을 떠난 뒤, 상속인인 자녀들이 이 집을 노인과 장애인 연구에 사용해달라며 피츠버그대학교에 기증했다. SHRS는 이곳을 재활과학기술학과, 작업치료학과, 보건의료정보학과가 함께 활용하는 가정환경 연구실이자 테스트베드로 운영하고 있다.
피츠버그대학교 SHRS가 운영하는 Healthy Home Lab(HHL) 정면. 이곳은 실제 미국 중산층 주택을 활용해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IoT 의료기기, 스마트 보조기기, 주거환경 개선 기술을 실증하는 가정환경 연구실이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피츠버그가 다시 열어준 시간
2026년 현재 피츠버그대 의과대학은 U.S. News의 연구 분야 최고 의과대학 그룹인 티어1(Tier 1)에 속해 있다. 재활의학과는 미국 NIH 연구비 수주 1위, 작업치료학과 역시 공식 랭킹 1위다. 여기에 독보적인 재활과학기술학과까지 갖추고 있으니, 장애인 재활에서 의학·치료·기술을 함께 아우르는 미국 최고의 팀을 보유한 셈이다.
이처럼 압도적인 교육환경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포닥과 교수직까지 거치면서 나는 카이스트 4학기 때 사고를 당한 뒤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시간을 조금씩 되찾을 수 있었다. 절치부심하며 보내야 했던 16년의 공백도 피츠버그에서의 공부와 연구 속에서 서서히 걷혀갔다.
2001년 6월 11일, 아내와 딸과 함께 우리 가족은 피츠버그로 이사 왔다. 오기 전 RST 학과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내가 수행할 프로젝트도 미리 배정받았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여러 장의 사진을 이용해 집의 3D 모델을 만드는 포토그래메트리(Photogrammetry) 기술 과제였다.
김종배 교수가 피츠버그대학교 박사과정 초기에 수행한 포토그래메트리 기반 연구 자료. 여러 장의 2D 사진을 활용해 실내 공간의 3D 모델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원격 주거환경 평가와 접근성 연구의 기초가 됐다. 자료=김종배 교수 제공처음에는 걱정도 있었다. 재활공학 연구라면 휠체어나 욕창 방지 방석을 직접 깎고 붙이는 과제를 맡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컴퓨터로 하는 작업이라 마음이 놓였다.
프로젝트 책임자는 데이비드 브리엔자 교수였다. 피츠버그에 도착한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인사하자, 그는 언제 왔느냐고 물었다. “어제 왔다”고 하니 연구과제 회계담당자를 불러 이렇게 지시했다. “미스터 킴, 어제 날짜부터 급여 계산해 주세요.”
이후 대한민국 정보통신부의 해외 박사과정 유학생 지원 장학금에도 선정됐다. 사고 이후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쉽지 않았던 나에게,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로 정당한 급여와 장학금을 받는 경험은 큰 전환이었다.
그렇게 피츠버그대학교 SHRS 재활과학기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다시 사람대접을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조금씩 자립할 수 있었다. 나의 학교이자 일터였던 SHRS에서 쌓은 공부와 연구의 시간이, 결국 우수동문상이라는 뜻밖의 자리까지 이어진 것이다.
차세대 연구자에게 투자한다는 것
비록 내가 준비한, 말하자면 ‘자작극’ 같은 시상식이었지만 로리 쿠퍼 교수는 끝까지 진지하게 자리를 이끌어주었다. 그는 이후 자신의 링크드인에 시상식 사진과 함께 소감을 남기며 다음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Moments like this remind us why we invest so deeply in the next generation of researchers — because they go on to do extraordinary things.”
그는 이런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왜 차세대 연구자들에게 깊이 투자해야 하는지를 다시 일깨워준다고 했다. 그들이 결국 놀라운 일을 해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년 가까이 조용히 묻혀 있던 트로피 하나가, 피츠버그에서 다시 시작했던 나의 시간과 그 시간을 가능하게 해준 사람들을 불러냈다. 상은 늦게 도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조금도 늦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