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시내버스에 휠체어 이용자의 승하차를 돕는 전동식 경사로가 펼쳐져 있다. 뉴욕의 시내버스는 100% 저상버스로 운행되며, 경사로가 운전석 쪽에서 자동으로 작동해 휠체어 승객이 타고 내릴 때 운전사가 직접 내려 경사판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185kg 전동휠체어와 라과디아 공항
피츠버그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쯤 지나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했다. 비가 조금 내려 창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창가에 앉은 이 선생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내 전동휠체어가 안전하게 내려오는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국내선 작은 비행기를 탈 때면 늘 불안하다. 무게 185kg, 높이 108cm에 달하는 전동휠체어를 여행가방이 들어가는 작은 카고에 넣고 빼는 작업은 말 그대로 ‘코끼리 냉장고 넣기’다.
다행히 라과디아에서는 휠체어가 무사히 비행기 문 앞까지 도착했고, PRM(Passengers with Reduced Mobility) 서비스도 잘 이어졌다. 공항은 예상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과거 미국의 대표적인 낙후 공항으로 꼽혔지만, 대규모 재건축을 거치면서 마치 대형 백화점처럼 달라져 있었다.
호텔은 맨해튼 타임스퀘어 인근이었다. 택시는 비싸서 공항 무료 셔틀을 타고 퀸스의 잭슨 하이츠·루즈벨트 애브뉴역까지 간 뒤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옐로캡에 붙어 있던 휠체어 마크
뉴욕의 옐로캡. 뉴욕시는 법원 합의에 따라 전체 옐로캡 면허의 최소 50%를 휠체어 탑승 가능 차량(WAV)으로 전환하도록 했다. 현재 운행 중인 옐로캡의 절반 이상이 WAV로 전환됐다. (사진=123RF)공항을 빠져나오는데 뉴욕의 상징인 옐로캡(Yellow Cab)이 길게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며 뒤를 보니 상당수 차량 오른쪽 위에 ‘휠체어 마크’가 붙어 있었다.
“아니, 이 옐로캡들이 휠체어 승객도 태울 수 있다는 말인가?”
뉴욕시는 장애인단체와의 합의 등을 통해 옐로캡의 과반수를 WAV(Wheelchair Accessible Vehicle), 즉 휠체어 탑승 가능 차량으로 전환해왔다. 우버나 리프트 같은 차량호출 서비스에서도 WAV 차량을 선택할 수 있다. 휠체어 사용자도 필요할 때 일반 승객처럼 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무료 셔틀을 타고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오래된 역이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여러 대 있었고, 승객들은 OMNY 단말기에 카드를 터치하고 들어갔다. 우리도 카드를 댔는데 마지막에 들어오던 이 선생의 카드만 계속 승인이 되지 않았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긴 여행 끝이라 모두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결국 택시 앱을 켰다. WAV 옵션을 선택했더니 바로 차량이 잡혔다. 옐로캡형 미니밴이 올 수도 있고, 우버·리프트 전용 차량이나 전문 콜택시회사의 휠체어 밴이 배차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는 긴 이동 끝에 타임스퀘어 근처 호텔에 도착했다.
나에게 ‘무난했다’는 말이 특별한 이유
3년 전 NYU 브루클린 캠퍼스에서 만난 스티브와 함께 전철역으로 향하는 김종배 교수의 모습.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피츠버그에서 뉴욕 맨해튼까지 오는 동안 지하철 카드 해프닝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무난했다.
무난?
그렇다. 180kg이 넘는 전동휠체어를 타고도 비행기, 버스, 택시를 이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의 시민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무난했다’는 사실 자체가 특별하다. 이동할 때마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겪고, 때로는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했던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뉴욕시는 저상버스도 일찍 도입했다. ADA가 제정된 1990년보다 앞서 1980년대부터 휠체어 탑승 가능한 버스를 도입했고, 이후 전 시내버스를 휠체어 접근 가능한 차량으로 운영해왔다.
3년 전 국토교통부 저상광역버스 개발 연구에 참여하면서 뉴욕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NYU의 그레이스 김 교수와 이하예나 박사의 도움으로 브루클린 캠퍼스 Ability Project 연구실에서 MTA 접근성 담당자와 장애인 활동가들을 만났다.
당시 뉴욕시는 엘리베이터나 리프트 설치 같은 물리적 접근성을 넘어, 시각장애인과 이동약자를 위한 스마트 길안내 기술 ‘NaviLens’를 대중교통에 접목하고 있었다. 출발지에서 정류장, 승강장, 목적지까지 GPS가 해결하지 못하는 세밀한 길안내를 대중교통망과 연결하려는 시도였다.
‘한국은 IT 강국’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약자를 위한 기술을 실제 대중교통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런 것이 진짜 IT 강국 아닐까.”
이동권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
뉴욕 지하철 OMNY 개찰구. 뉴욕 지하철역에 설치된 휠체어 이용자용 AutoGate와 비접촉 결제시스템 OMNY 단말기. 휠체어와 유모차, 자전거 이용자 등이 보다 넓은 개찰구를 통해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뉴욕의 휠체어 택시는 편리하지만 가격이 비싸다.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장애인도 경제적인 선택지인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까지 가기 어려운 장애인과 노인은 어떻게 할까.
미국에는 파라트랜짓(Paratransit)이 있다. 일반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장애인을 집 앞에서 목적지까지 연결해주는 특별교통수단이다. 여러 휠체어 승객이 함께 탈 수 있는 큰 밴을 운영하고, 대부분 하루 전까지 예약하는 방식이다.
한국에도 특별교통수단인 장애인콜택시가 있다. 미국의 WAV 일반택시와 파라트랜짓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예약도 가능하지만 즉시 호출 방식이 많이 사용된다.
문제는 기다리는 시간이다. 이용자가 몰리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차량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있다. 법은 있다. 그러나 필요할 때 탈 수 없다면 이동권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이 연재 4편에서 미국 의학한림원(IoM)의 새로운 장애 모델을 소개한 적이 있다. 장애는 개인의 육체적 조건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필요한 지원을 사회와 정부가 충분히 제공하지 못할 때 더 커진다는 관점이다.
그렇게 보면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의 크기는 결국 사회가 얼마나 준비돼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옥의 부엌’이 내게는 천국의 부엌
뉴욕 맨해튼 헬스키친(Hell’s Kitchen) 거리. 9번가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음식점과 상점이 빽빽하게 들어선 지역으로, 김 교수는 휠체어를 타고 이동하며 식당과 상점의 출입 접근성을 직접 살펴봤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호텔은 타임스퀘어와 브로드웨이 극장가에 붙어 있는 헬스키친(Hell's Kitchen)에 있었다. 9번가를 중심으로 태국, 베트남, 에티오피아, 이탈리아, 남미, 한국 음식점과 카페, 바가 빼곡한 동네다.
저녁에는 나도 ‘지옥의 부엌’으로 나가 베트남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식당 입구의 턱 때문에 들어가지 못할 걱정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됐다. 한국에서 수없이 턱 앞에 멈춰 섰던 나 같은 장애인에게는 오히려 ‘천국의 부엌’이었다. 물론 음식값에 팁까지 내려고 하니 손이 저릴 만큼 비쌌지만.
뉴욕시는 옐로캡의 상당수를 WAV로 바꾸고, 버스 접근성을 일찍 갖추고, 여기에 IT 기술까지 접목하고 있었다.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장애인의 이동권을 진심으로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도 이제 경제력이나 기술이 부족해서 못 하는 단계는 지났다.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 필요할 때 버스를 타고, 택시를 부르고, 원하는 식당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제도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일이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필요하면 택시를 부르고, 저녁에는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는 것.
비장애인에게 평범한 하루가 장애인에게도 평범해지는 것. 그것이 이동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