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시절 김종배 교수의 가장 가까운 ‘독립군’이었던 아내와 대학생 활동지원사 매튜가 함께한 모습. 아내의 돌봄에 대학생 활동지원사가 합류하면서 김 교수는 연구와 일상을 보다 독립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당시 자신을 도왔던 학생 활동지원사들을 ‘학도병 독립군’이라고 부른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하루쯤은 쉬어야 했다
뉴욕에 도착해 자고 난 다음 날은 하루 쉬기로 했다. 이 선생도 권 연구원도 완전히 뻗어버렸다.
보통 미국 출장을 가면 목적도시는 한두 곳인데, 이번에는 애틀랜타, 피츠버그에 이어 뉴욕까지 세 도시를 돌았다. 일정도 꽉 차 있었다. 다행히 뉴욕에서는 둘째 날 두 가지 이벤트가 같은 장소에서 진행될 예정이라 첫날은 푹 쉬기로 했다.
사실 나와 같은 사지마비 중증장애인은 혼자 힘만으로 독립해 살아가기 어렵다.
장애인 인권운동, 특히 ‘독립생활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 로버츠는 중학생 때, 1950년대 미국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폴리오(Polio·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전신마비가 됐다. 하루 18시간을 약 140kg의 쇠로 만든 드럼통 같은 인공폐 안에서 식물인간 같이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엄마와 가족의 헌신으로 공부를 이어갔고, UC버클리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생활의 길로 들어섰다. 활동지원인 서비스를 받고, 전동휠체어와 휴대용 인공호흡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보다 독립적인 삶이 가능해졌다.
장애인의 독립은 불굴의 의지로 남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해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나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에드 로버츠는 그런 삶을 실천하면서 오늘날 미국에 400여 개, 한국에도 200여 개 등 전 세계에서 운영되는 장애인독립생활센터의 기초를 놓았다. 그래서 그는 장애인 독립생활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에드 로버츠는 전동휠체어 같은 기술을 ‘해방자(Liberator)’라고 했다. 나는 나를 독립적으로 살아가게 지원하는 사람들, 곧 나를 장애에서 해방시키고 독립시키는 사람들을 ‘독립군’이라고 부르고 싶다.
가족에서 활동지원사까지, 나의 ‘독립군’
미국 유학 시절 김종배 교수의 활동지원사로 함께했던 아담. 야구 투수로 활동하던 대학생이었던 그는 김 교수의 식사와 일상생활 등을 지원한 ‘학도병 독립군’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신체기능의 제한으로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어려움, 곧 장애를 가진 사람을 그 장애에서 해방시키고 독립시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독립군들이 있다.
첫 번째 독립군은 배우자와 부모일 것이다. 사회와 국가의 지원도 거의 없던 시절, 이들은 때로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질 때까지 장애인의 삶을 지탱해왔다. 말하자면 1급 ‘독립 유공자’들이다.
내가 미국에 가기 전에는 부모가, 이어서 아내가 독립군이 되어야 했다. 다행히 미국에 가니 하루 7시간, 대학생 아르바이트 활동지원사들과 가정간호사가 독립군으로 합류했다.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내에게 숨 쉴 공간이 생겼다.
미국에서 나의 독립을 위해 일했던 활동보조인들은 주로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시급을 받고 일했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학도병 독립군’이었다.
네 명 정도가 팀을 짜 서로 수업 시간을 맞춰 하루 세 차례 연구실에 와서 화장실 이용과 점심식사, 서류 정리 등을 도왔다. 집에서는 아침 일찍 와서 옷을 입히고 휠체어에 앉히고 씻는 일을 도와 출근 준비를 해줬다. 저녁에는 간호사나 학생 활동지원사가 배변과 씻기, 침대에 눕는 일을 도왔다.
그 학생들은 훗날 의사, 보조의사(PA), 간호사, 작업치료사, 물리치료사, 의지보조기사 등 대부분 보건·재활 분야 전문가가 됐다.
김종배 교수와 17년째 함께하고 있는 활동지원사 이응찬 씨. 김 교수의 일상과 연구·출장을 오랫동안 지원해온 ‘현역 독립군’으로, 이번 미국 출장에도 동행해 애틀랜타와 피츠버그를 거쳐 뉴욕까지 함께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마침 활동보조인 제도가 만들어져 서비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나의 활동보조 업무를 시작한 이응찬 선생은 17년째 ‘활동지원사’로 독립군에 말뚝을 박고 있다.
직업군인처럼 정부가 월급을 지원하는 활동지원사 제도는 한국에서도 이제 꽤 잘 운영되고 있다. 현역 독립군 이 선생은 은퇴도 못 하고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이번 미국 전투에도 참여해 뉴욕까지 진군한 뒤 결국 뻗어버렸다.
그래서 그날은 이 선생과 권 연구원에게 특별 휴가를 줬다.
쉬라면서 나는 또 맨해튼으로
그런데 정작 이 휠체어 탄 사지마비 재활공학 교수는 좀처럼 가만히 누워 있지를 못했다. 더 독립을 누리겠다며 오후에 혼자 맨해튼을 돌아다녔다.
늦은 오후에는 독립군 노병 이 선생을 다시 불러냈다. 타임스퀘어에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내려가 32번가 코리아타운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34번가 파리바게트에서 커피를 마셨다. 해가 지면서는 타임스퀘어의 찬란한 야경을 향해 브로드웨이를 걸어 올라갔다.
세계 장애인 인권법의 모델로 불리는 미국장애인법(ADA)도 장애인들이 독립군과 독립기술의 지원을 받으며 보다 온전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결과였다.
보이지 않는 군대, ‘히든 아미’
그 전장의 뒤에는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지원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시민의 성원과 지지, 그리고 유력 정치인들의 보이지 않는 지원도 있었다.
장애인 가족을 둔 톰 하킨, 에드워드 케네디, 조지 부시, 로웰 와이커와 2차 세계대전 상이군인이었던 밥 돌 상원의원 등 정치권의 힘도 ADA의 연방의회 통과와 대통령 서명에 중요한 동력이 됐다. 이들이 바로 ‘히든 아미(Hidden Army·숨겨진 군대)’였다.
나에게도 히든 아미가 있었다.
김종배 교수의 고교 시절 친구들. 사고 후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친구들은 당번을 정해 밤마다 병실을 지키는 등 김 교수의 재활과 일상을 곁에서 도왔다. 김 교수에게 이들은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이 돼준 ‘히든 아미’였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당번을 정해 밤마다 병실을 지켜준 친구들, 퇴원 뒤 서울에서 칩거할 때 영적 재활을 위해 전도하던 목사 친구, 고향집에 머물 때 교회의 열 개가 넘는 계단을 나를 업고 오르내린 매형과 친구들이 있었다.
미국 유학을 타진하자 LA로 오라고 한 뒤 비행기에 동행해 피츠버그대학교 면접까지 데려가 휠체어 탑승 밴을 빌려 워싱턴DC까지 운전해 준 친구, 그곳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워싱턴을 구경시켜주고 공항까지 데려다준 또 다른 친구도 있었다.
유학을 떠날 때 노잣돈이나 수표를 건네준 친구들, 초기 유학 시절 피츠버그까지 한국 라면을 박스째 사 들고 찾아온 친구 가족, 뉴욕에서 우리 부부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던 선배도 있었다.
그리고 피츠버그대학교, 국립재활원, 연세대학교에서 함께했던 교수와 동료, 직원, 연구원, 대학원생들까지…. 돌아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나의 독립을 뒤에서 밀어줬다.
왼쪽은 김종배 교수의 미국 유학을 도운 LA 친구, 오른쪽은 대학 시절부터 재활과 유학을 응원해온 친구들이다. 김 교수는 이들을 자신의 ‘히든 아미’로 기억한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전동휠체어도 하나의 ‘독립무기’
에드 로버츠가 활동지원인 못지않게 전동휠체어를 중요한 독립의 도구로 봤듯, 나에게도 기능성 전동휠체어와 OVR이 지원한 자가운전 차량, 주거환경 개조 같은 보조기술이 중요한 ‘독립무기’였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주행 기능만 있는 기본형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좋은 의료보험을 제공받았고, 보험을 통해 기존 휠체어보다 10배, 20배 비싼 프리미엄 기능성 전동휠체어를 자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침대처럼 펴서 쉬고, 높은 곳에 손이 닿도록 좌석을 올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런 휠체어가 있는 줄도 몰랐다.
하루 종일 앉아 있어야 하는 사지마비 휠체어 사용자에게 이런 기능성 시트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오래 앉아 일할 수 있는 지구력을 높이고 업무 수행에서 비장애인과 경쟁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는 진정한 독립무기다.
좋은 의료보험 역시 나에게는 최고의 독립무기였다. 의료비가 천문학적으로 비싼 미국에서도 병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필요한 보조기기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김종배 교수가 전동휠체어에 딸을 태워주는 모습. 김 교수는 에드 로버츠가 전동휠체어를 ‘해방자(Liberator)’라고 표현했듯, 기능성 전동휠체어를 자신의 독립생활과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독립무기’로 꼽는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반면 한국의 의료보험은 아직도 중증 사지마비 장애인에게조차 주행 기능 중심의 전동휠체어와 제한적인 틸트 옵션만을 지원하고, 가격도 비현실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이 가격 구조에서는 국내 기업이 고기능 제품을 개발·공급하기 어렵고, 저가 수입제품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될 수밖에 없다.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이 여전히 후진국 시민처럼 취급받는다고 느끼는 이유다. 장애인의 독립과 직업능력을 높이는 보조공학기술의 중요성을 보건복지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독립은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의 독립은 장애인 자신의 노력만으로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장애인차별금지법과 활동지원인 제도, 통합과 존중·배려의 문화 같은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 동시에 접근 가능한 건물과 교통, 의료급여, 전동휠체어와 휴대용 인공호흡기 같은 복합재활기술 보조기기에 대한 폭넓은 지원도 갖춰져야 한다.
그때 비로소 ‘장애라는 어려움의 크기’는 줄어들고, 반대로 ‘독립할 능력’은 커진다. 그리고 장애인은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 자신의 역할을 더 넓혀갈 수 있다.
결국 부모와 배우자, 활동지원사 같은 ‘독립군’뿐 아니라 친구와 동료, 제도와 기술, 정치와 사회라는 ‘히든 아미’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물리적·사회적 환경이 독립군과 히든 아미의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신체적 약자가 겪는 장애의 크기는 줄어들고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은 더 커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