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명소 탐방기 [35] - 원효와 요석공주, 설총을 찾아 나선 경주여행 ③
국보 30호인 분황사 모전석탑분황사는 경주 구황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라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분황사는 원효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공간이다. 원효는 분황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백성들과 어울리며 대중불교의 길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분황사는 입구의 분위기가 여느 사찰과는 확연히 다르다. 산사가 아니라 도심의 평지에 소재한 것부터 그렇다. 현대식 조형으로 서 있는 거대한 사찰표지석엔 “원효의 성지, 국보 제30호 분황사”라고 새겨져 있다. 국보는 분황사 건물이 아니고 절 안에 있는 3층 모전석탑이다. 절 출입문은 일주문 구조가 아니고 사천왕문도 없다. 그냥 평범한 한옥 건물이다. 고찰의 분위기는 느끼기 어렵다.
바로 앞에는 황룡사지가 펼쳐져 있다. 현재는 광활한 대지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 이 초석을 기준으로 추정되는 가람의 면적이 불국사의 8배나 된다니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국가유산청에 등록된 황룡사지의 공식 지정 면적은 약 39만㎡에 이른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신라 최대의 국가 사찰로, '황룡'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왕권의 위엄과 삼국통일의 염원을 담은 호국 불교의 총본산이었다. 반면, 분황사(芬皇寺)는 634년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로,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라는 이름을 선덕여왕을 상징하는 명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황룡사는 국가 중심의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그 거대한 황룡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로 옆 분황사에서 원효대사가 "누구나 아미타불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며 승복을 벗고 거리로 나선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가장 권위 있는 국가 사찰의 문턱 바로 앞에서, 백성들을 향한 대중불교의 싹이 피어났다.
결론적으로 황룡사와 분황사의 공존은 단순한 지리적 인접을 넘어, 신라 왕실이 추구한 국가적 위엄이 실린 황룡사와 여왕의 섬세한 덕치 및 학문적 깊이를 추구한 분황사가 서로를 밀어주고 당겨주며 빚어낸 신라 문화의 절정기 그 자체를 의미한다. 비록 지금 황룡사는 빈터로 남고 분황사는 소박해졌지만, 두 자리가 뿜어내는 역사적 무게는 여전히 서라벌 들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다.
원효의 성지이자 국보가 있다는 분황사 입구의 표지석
일반 사찰의 일주문격에 해당하는 출입문
광활한 황룡사지, 왼쪽의 담장과 숲은 분황사
전설 깃든 육모정과 원효대사 비부분황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국보인 모전석탑이다. 벽돌처럼 다듬은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탑은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투박하고 담백했다. 하지만 그 단정한 침묵 속에는 천년의 풍상이 켜켜이 내려앉아 있었다.
한때 9층이었다고 전해지는 탑은 지금 3층만 남아 있다. 그러나 무너져 사라진 층들조차 보이지 않는 시간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듯했다.
분황사 모전석탑을 지나 경내 한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소박하지만 단정한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원효대사의 영정을 모셔둔 원효각(元曉閣)이다. 전통 한옥이 아닌 현대식 건물이다. 건축 재료와 디자인 형태로 보아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화려하고 웅장한 여느 사찰의 전각과 달리 분황사의 원효각은 규모가 작고 담담한 모습을 하고 있어 오히려 평생을 저잣거리에서 백성들과 함께 호흡했던 원효대사의 ‘무애(無碍) 정신’과 무척이나 닮아있다.
원효각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안치된 원효대사의 영정(초상화)을 마주하게 된다. 영정 속 원효대사는 날카로운 학자의 모습보다는, 세상의 모든 대립을 조화롭게 아우르고자 했던 인자하고도 깊은 눈빛을 지니고 있다.
영정 주변으로는 그를 기리는 글귀들과 사상을 설명하는 패널들이 배치되어 있다. 핵심은 단연 '화쟁'과 '일심'이다. 고려 시대 숙종은 원효대사의 높은 덕을 기리며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화쟁'이란 "서로 다른 이론과 주장을 다투지 않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화합한다"는 뜻으로, 파벌과 교리에 갇혀 싸우던 불교계를 하나로 묶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려 했던 원효의 평생 철학이 담긴 이름이다.
원효각 내부 한편에는 원효대사의 가장 유명한 일화인 ‘해골물 일화(의상대사와 당나라 유학길에 깨달은 일체유심조)’와 요석공주와의 인연,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박을 두드리며 무애가를 부르던 모습 등이 그림과 설명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림들은 원효의 생애 순서로 표현하고 있다. 출가와 수행,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나는 장면, 해골물 사건, 깨달음을 얻는 장면,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모습, 무애춤과 무애가를 통해 대중교화하는 모습, 만년의 저술 활동을 담고 있다.
원효각에는 팔상도 형식을 응용한 그림도 있다. 원래 팔상도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그린 불화다. 원효각에서는 이를 응용하여 원효의 생애를 석가모니의 수행과 깨달음에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구성한 내용이다.
역사적으로 이 공간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가장 애틋한 전설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원효대사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설총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원효의 유골을 곱게 갈아 진흙과 섞어 실물 크기의 소상(塑像, 진흙으로 만든 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분황사에 모셔두고 늘 공경하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하루는 설총이 머리를 숙여 예배하자, 원효의 소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아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며 원효각을 바라보면, 종교적 거룩함 너머에 있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깊은 혈육의 정과 그리움이 전각 내부에 잔잔하게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소상은 몽골 침략 등 전란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원효각 바로 인근 마당에는 현재 비석의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만 남은 '경주 분황사 화쟁국사비부'가 자리하고 있다. 고려 시대에 원효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던 흔적이다. 비부 옆에 자리한 6각 우물도 오랜 전설을 안고 있다.
원효각의 영정을 뵙고 나와 오랜 세월을 견뎌온 거북 받침돌을 함께 바라볼 때, 분황사가 지닌 ‘원효의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비로소 완성된다.
귀족과 백성, 승려와 평민, 높은 자와 낮은 자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던 그의 ‘화쟁’ 사상은 어쩌면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한 가르침인지 모른다.
분황사 원효각 건물, 다만 휠체어 출입을 어렵게 하는 한 뼘의 단차가 거슬린다.
원효상과 원효의 일생을 소재로 하는 그림들, 왼쪽 벽면의 그림은 화쟁을 주제로 하는 그림이다.
원효각 내 원효대사의 일생을 소재로 한 그림들분황사를 떠난 발길은 조금 더 깊숙하고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경주 보문동 423번지에 있는 설총의 묘다. 설총묘로 가는 길은 화려하지 않다. 조용한 시골마을 골목길에 가깝다.
설총묘는 경주에 산재한 신라시대 왕릉보다는 한참 작지만 조선시대의 왕릉보다는 훨씬 크다. 신라시대 귀족 무덤의 위용은 남아 있다. 무덤 앞에는 ‘홍유후설총묘’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무덤의 공식 명칭은 「전(傳)홍유후설총묘」다. 명칭에서 보는 것처럼 설총묘로 전해지고 있다는 곳이고, ‘홍유후’는 고려 현종이 설총에게 추증한 시호다.
묘역 주변의 소나무들은 오래된 선비처럼 말없이 서 있다. 신라의 화려한 왕릉들 속에서 설총의 무덤은 오히려 담담했다. 그러나 그 소박함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글과 사상으로 신라의 정신을 바꾸었다. 특히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를 체계화한 업적은 당시 백성들과 관리들에게 새로운 언어의 길을 열어주었다.
설총묘로 전해오는 무덤, 묘지 앞 상석의 구조가 독특하다.며칠 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다시 또 하나의 만남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설총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박물관에 들어서서 건물의 층별 안내표지판을 바라봤는데 특이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몇 층이 고대관이고 몇 층이 중세관인지 등을 간단하게 안내하는 표지판이지만 3층(조각·공예관, 세계문화관)에는 감산사 아미타불이 301호에 전시되어 있다는 내용을 특별히 표기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1만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지만 굳이 특정 유물의 전시 공간을 입구에서부터 따로 안내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마침내 경주 감산사 터에서 올라온 두 석불상 앞에 섰다. 하나는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이고, 하나는 ‘미륵보살상’이다. 나란히 서 있는 불상은 놀라울 만큼 인간적이다. 엄숙하지만 차갑지 않고, 위엄이 있지만 압도적이지 않다. 풍만한 얼굴과 당당한 어깨, 두터운 옷주름 속에는 통일신라 사람들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인간상이 담겨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이 불상이 특별한 이유는 뒷면에 새겨진 설총이 지었다는 조성기 때문이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닳고 닳아 육안으로는 판독하기 어렵지만 돌에 새겨진 그 조성기의 말미에는 나마(관직명) 총(일반적으로 설총으로 해석)이 왕명을 받들어서 문장을 지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감산사는 신라 성덕왕 18년인 719년, 김지성이라는 고위 관리가 부모의 명복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며 창건한 사찰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상을, 아버지를 위해 아미타여래상을 조성했다. 조성기에는 부모를 향한 효심, 나라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중생 모두의 복을 기원하는 신라인들의 세계관이 함께 담겨 있다.
나는 불상 뒤편 조성기 설명문 앞에 오래 머물렀다. 생각해 보면 설총은 단지 한 시대의 학자가 아니었다. 원효가 사람들의 마음속 벽을 허물었다면, 설총은 사람들의 언어 속 벽을 허물었다.
세월은 흐르지만 글과 사상은 돌처럼 오래 살아남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의 조명이 불상의 얼굴 위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천년의 시간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 곁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층별 안내판, 301호 감산사 아미타불의 전시실 위치를 특별히 별도로 안내하고 있다.
경주 감산사 터에서 발굴된 석불상의 모습
설총이 지었음을 알리는 조성기가 새겨진 석불상 뒷면의 모습, 육안으로 판독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