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핀 무궁화의 모습8월 8일, 지난주 토요일은 ‘무궁화의 날’이었다. 무궁화를 국화로 지정한다는 법령은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무궁화를 국화로 인식한다. 무궁화의 날 또한 법령으로 정해진 바는 없다.
그러나 이날에는 우리 민족과 오랜 세월을 함께해 온 꽃, 무궁화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왜 8월 8일일까. 숫자 8을 옆으로 눕히면 끝없이 이어지는 수학의 무한대 기호 ‘∞’와 닮는다. ‘끝이 없다’는 뜻의 무궁(無窮)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8월은 무궁화가 한창 꽃을 피우는 계절이다. 그래서 8이 두 번 겹치는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삼았다.
무궁화라는 이름부터 의미가 깊다. 식물이나 꽃 이름은 생김새나 특성에서 따오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궁화처럼 사상이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은 드물다.
실제로 무궁화는 한 송이가 한번 피어 몇 달을 버티는 꽃은 아니다. 아침에 활짝 피었다가 저녁이면 시들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다음 날이면 다른 꽃봉오리가 다시 열린다. 그렇게 여름부터 가을까지 수많은 꽃이 피고 진다. 어쩌면 이것이 무궁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무궁화와 우리 민족의 인연은 근대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옛 문헌에도 한반도를 ‘근화향(槿花鄕)’, 즉 무궁화가 피는 나라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도 무궁화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무궁화는 궁궐 깊숙한 곳에만 피는 귀한 꽃이 아니라 백성의 삶 가까이에 자리한 친숙한 꽃이었다. 광복 이후 무궁화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우리는 일상에서 생각보다 자주 무궁화를 만난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상징 곳곳에 무궁화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국장(國章)에는 태극 문양을 둘러싼 무궁화 꽃잎이 있다.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 문양에도 무궁화가 사용된다. 국가기관의 여러 휘장과 표장에서도 무궁화를 찾아볼 수 있다. 훈장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 이름도 ‘무궁화대훈장’이다. 국회의원의 금뱃지도 무궁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활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무궁화, 8월 8일 수원천에서그런데 무궁화가 오늘날과 같은 강력한 민족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근대 이후였다.
개항과 국권의 위기 속에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들이 필요해졌다. 태극기가 나라를 상징하는 깃발이 되었다면, 무궁화는 민족의 생명력과 나라의 영속성을 상징하는 꽃으로 자리 잡아갔다.
그 흔적은 애국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 무심코 지나치기 쉽지만 생각해보면 대단히 상징적인 구절이다. 무궁화가 삼천리 강산과 결합하면서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우리 국토와 민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 것이다.
무궁화의 의미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더욱 특별해졌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태극기와 한글, 애국가처럼 무궁화 역시 민족의식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독립운동과 민족교육 과정에서 무궁화를 사랑하고 보급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꽃 한 송이를 심는 일이 어떻게 독립운동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시대에는 가능했다. 말과 글, 노래와 꽃까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궁화 한 그루를 심는 것은 단순한 원예활동을 넘어 ‘우리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마음을 심는 일이기도 했다.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벚꽃처럼 한꺼번에 피어 장관을 이루는 꽃도 아니다. 무궁화의 매력은 오히려 다른 곳에 있다. 오늘 꽃이 지면 내일 또 핀다. 내일 꽃이 지면 모레 또 핀다. 비바람이 지나간 뒤에도 새로운 꽃봉오리가 열린다.
그래서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역사에는 수많은 전쟁과 외침이 있었다. 나라를 잃었던 시절도 있었다. 가난과 전쟁의 폐허도 겪었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이 쓰러졌지만 다음 사람이 다시 일어났다. 한 송이가 지더라도 다른 꽃이 다시 피는 무궁화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무궁화가 상징하는 것은 단순한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무궁화는 단순히 대한민국을 상징하기 때문에 소중한 꽃이 아니다. 그 작은 꽃잎 속에는 오랫동안 이 땅을 살아온 사람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8월의 무더위 속에 만개한 무궁화그런데, 무궁화의 날이 탄생한 경위를 보면 씁쓸함과 감동이 교차한다.
2006년 나라사랑 무궁화 어린이 기자단은 정부에 무궁화의 날 제정을 건의했으나 정부 차원의 지정은 곤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기념일규정’은 대통령령이라서 행정부의 소관이다.
그러나 어린이들은 굳건한 뜻을 세우고 1만명 서명운동을 전개했으며, 각계의 의견수렴으로 매년 8월 8일을 무궁화의 날로 하기로 정했다. 그리고 2007년 8월 8일 정부의 공식참여 없이 어린이들끼리 국회의원회관과 울릉도에서 선포식을 가졌다.
정부가 외면한 무궁화의 날이 민간영역에서나마 어린이들의 땀방울로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8월 8일 무궁화의 날, 전국에 무궁화가 만개하고 마침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길을 가다가 무궁화를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라와 민족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면서 꽃송이들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2007년 8월 8일 어린이들의 무궁화날 선포식 모습(사진=교육부 공식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