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명소 탐방기 [37] - 양평 세미원과 두물머리 ②

세미원 내에 있는 세한정의 입구, 건물 왼쪽벽의 둥근창이 세한도에 나오는 건물을 연상시킨다.
세미원 내에 있는 세한정의 입구, 건물 왼쪽벽의 둥근창이 세한도에 나오는 건물을 연상시킨다.

양평 세미원 내에 있는 세한정(歲寒庭)은 일반적인 한옥 정원이 아니다. 이곳은 추사 김정희의 국보 세한도(歲寒圖)를 실제 공간으로 옮겨 놓은 '입체 문인화'에 가깝다. 세미원에서는 이곳을 "추사 김정희와 제자 이상적의 아름다운 사연이 담긴,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약속의 정원"으로 소개하고 있다.

정원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넓은 여백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보통의 전통정원이라면 꽃과 나무를 빽빽하게 심었을 법하지만, 세한정은 의도적으로 많은 공간을 비워 두었다. 그 이유는 원작 세한도가 극도로 절제된 구성을 가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텅 빈 공간 속에 몇 그루의 소나무와 측백나무, 그리고 외로운 집 한 채. 세미원의 세한정 역시 이 여백을 그대로 살려 놓았다. 정원을 걷는 동안 관람객은 화려한 색채보다 고요함과 적막함을 먼저 만나게 된다.

정원의 중심에는 세한도 그림에서 본 듯한 벽면에 둥근 창이 있는 단정한 한옥 한 채가 자리한다. ’송백헌(松柏軒)‘이다. '송백(松柏)'은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뜻하며, 역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개와 의리를 상징한다.

내부 벽면에는 세한도의 영인본과 함께 추사 김정희의 생애, 유배 생활, 제자 이상적과의 인연을 소개하는 자료와 기록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추사와 이상적의 초상, 추사의 삶과 예술세계를 설명하는 전시물이 함께 구성되어 있어 관람객이 그림의 배경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세한도 앞에 서면 우리는 그림보다 먼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대학자이자 서예가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다. 젊은 시절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대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났고, 그들과 학문과 예술을 논하며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 사회를 이어주는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김정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깊은 경지를 이루었으며, 기존의 서체를 모방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그가 한 번 붓을 들면 사람들은 그 글씨를 얻고자 했고, 그의 학문과 안목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세한도 영인본과 추사관련 기록화 등이 전시된 송백헌
세한도 영인본과 추사관련 기록화 등이 전시된 송백헌
세한도의 모습과 추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그림들
세한도의 모습과 추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그림들
등굽은 소나무와 함께 서있는 나무들이 넓은 여백과 함께 세한도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등굽은 소나무와 함께 서있는 나무들이 넓은 여백과 함께 세한도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의 세계는 냉혹했다. 1840년, 김정희는 옥사에 연루되어 서귀포로 유배되었다. 한때 조정의 고위 관료였으며 수많은 사람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지만, 정쟁에 휘말려 죄인이 되자 세상은 순식간에 등을 돌렸다.

머나먼 제주에서 가족과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고, 언제 다시 자유의 몸이 될 것인지 기약조차 없었다. 김정희는 제주에서 자신의 인생에 닥친 가장 혹독한 겨울, 즉 세한을 맞고 있었다.

그때에도 변함없이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역관 이상적이었다. 조선시대의 역관은 단순한 통역관이 아니었다. 사신을 수행하는 외교 실무뿐 아니라, 새로운 문물을 조선으로 들여오는 문화 교류의 중개자였다. 특히 이상적은 여러 차례 연경을 방문하면서 청나라의 이름난 문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시문에도 능해 청나라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김정희와 이상적은 학문을 통해 사제간으로 만났지만 오랜 교류 속에서 서로의 인품과 뜻을 이해하는 벗이 되었다.

이상적은 청나라를 오갈 때마다 어렵게 구한 귀한 책들을 제주까지 보냈다. 시간과 비용은 물론이고 유배 중인 죄인과 계속 관계를 맺는 데 따르는 정치적 위험도 감수해야 했다. 이상적은 이 귀한 책들을 출세에 도움 줄 고관대작도, 큰 보답을 기대할 부자도 아닌,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늙은 죄인에게 보낸 것이다.

학문으로 살아온 김정희에게 책은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였고, 고독을 견디게 해주는 벗이었으며, 여전히 자신이 학자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 생명줄이었다.

김정희가 감동한 것은 책의 값이 아니라 제자의 변함없는 마음이었다. 김정희는 이상적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바로 세한도다.

원래 이 그림은 세로 약 23센티미터, 가로 약 1.08미터에 불과했다. ‘세한도’라는 제목 옆에 작은 글씨로 이상적 한 사람을 위해 그려졌음을 밝혔다. 그리고 “날이 추워진(세한)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는 뜻의 논어에 나오는 말을 덧붙였다.

논어에서 인용한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세한도 속의 문장이 안중근 의사의 필체로 새겨져 있다.
논어에서 인용한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세한도 속의 문장이 안중근 의사의 필체로 새겨져 있다.
세한정의 뜰에 전시된 석부작과 절개를 상징하는 문장들
세한정의 뜰에 전시된 석부작과 절개를 상징하는 문장들

김정희에게 유배는 바로 ‘세한’이었다. 그 겨울이 닥친 뒤에야 그는 이상적이라는 송백의 푸르름을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이상적은 스승에게서 받은 그림을 혼자 간직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중국 출장길에 세한도를 소중히 챙겨갔다. 연경에 도착한 이상적을 위해 청나라 문인들이 모임을 열었다. 이쯤 되면 청나라에서 이상적의 위상을 알 만하다.

이상적은 그 자리에서 두루마리를 펼쳤다. 먹빛으로만 그려진 쓸쓸한 집과 네 그루의 나무가 청나라 문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림 옆에 적힌 추사의 발문을 읽은 문인들은 그 속에 담긴 뜻을 곧 알아보았다.

그들은 이미 김정희라는 조선의 학자를 알고 있었다. 추사는 젊은 시절 연경을 방문해 옹방강과 완원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했고, 이후에도 편지와 서적을 통해 청나라 학자들과 학문적 관계를 이어왔다. 청나라 지식인들에게 김정희는 변방 조선의 이름 없는 선비가 아니라 금석학과 고증학, 서예에 뛰어난 국제적 지식인이었다.

청나라 16명의 문인들이 세한도를 보고 시와 글을 남겼다. 단순히 그림 솜씨를 칭찬하는 감상평이 아니었다. 추사의 고난을 위로하고 이상적의 의리를 찬양하며, 자신들도 군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되새기는 글이었다.

그 순간 세한도는 조선과 청나라 문인들이 학문과 정신으로 만나는 국제적인 교류의 장이 되었다. 이상적은 청나라 문인들의 글을 이어 붙여 다시 조선으로 가져왔다.

오늘날 전하는 세한도 두루마리는 전체 길이가 약 14.7미터에 이른다. 청나라 문인들의 글과 후대 소장자 및 한국 지식인들의 감상문이 계속 덧붙으면서 긴 두루마리가 되었다.

수많은 학자들의 찬문과 함께 긴 두루마리가 된 세한도와 일본에서 세한도를 되찾아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수많은 학자들의 찬문과 함께 긴 두루마리가 된 세한도와 일본에서 세한도를 되찾아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상단 왼쪽부터 청나라 문인들이 이상적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습, 추사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모습, 유배지에서 책을 읽는 추사의 모습, 청나라 문인들이 세한도를 감상하는 모습
상단 왼쪽부터 청나라 문인들이 이상적에게 연회를 베푸는 모습, 추사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모습, 유배지에서 책을 읽는 추사의 모습, 청나라 문인들이 세한도를 감상하는 모습

세한도의 감동은 소장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그림은 이상적 이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추사 연구자이자 경성대학교(지금의 서울대) 교수였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소유가 되었다. 그 역시 많은 돈을 주고 샀을 것이다. 그는 퇴직 후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세한도도 가져갔다.

1944년, 서예가 손재형은 세한도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도쿄로 찾아갔다. 그는 후지쓰카를 찾아가 두 달 동안 설득한 끝에 “당신 같은 한국인이라면 이런 보물을 충분히 소장할 자격이 있다"는 격려와 함께 마침내 작품을 돌려받았다고 한다.

당시는 태평양전쟁의 막바지로 도쿄에 미군의 공습이 이어지던 위험한 시기였다. 손재형이 세한도를 인수하고 나서 얼마 뒤 후지쓰카의 집이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세한도 역시 전쟁의 불길 속에서 사라졌을지 모른다. 세한정 벽면에는 이러한 극적인 내용도 기록화로 소개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세한도는 유난히 사람의 마음으로 지켜진 그림이다. 이상적은 유배된 스승을 잊지 않았고,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간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국내로 돌아와 손씨 집안에서 소장하던 그 그림은 손창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국민의 소유가 되었다.

시대와 상황은 달랐지만 이들의 행동에는 공통점이 있다. 당장의 이익보다 지켜야 할 가치를 먼저 생각했다는 점이다. 세한도에 그려진 송백의 정신이 그림 밖에서도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 세한정을 거닐다 보면 자연보다 먼저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신뢰, 어려울 때 더욱 빛나는 우정,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지켜 낸 품격. 세한정은 단순한 한옥 정원이 아니라, 한 폭의 문인화로 들어가는 공간이다. 추사의 붓끝에서 시작된 정신이 소나무와 담장, 기와와 여백 속으로 스며들어 오늘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한도를 빛을 더하고 국보로 돌아오기까지 큰 역할을 한 이상적과 손재형
세한도를 빛을 더하고 국보로 돌아오기까지 큰 역할을 한 이상적과 손재형
세한정 뜰 한 쪽의에 잘 가꾸어진 소나무의 모습
세한정 뜰 한 쪽의에 잘 가꾸어진 소나무의 모습

 조봉현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