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그레이스 전 교수가 연세대에서 열린 특강에서 장애인 의복 디자인과 오픈 스타일 랩의 활동을 소개하는 모습. 그는 장애인의 몸과 일상을 고려한 의복 디자인을 통해 패션과 접근성, 존엄의 문제를 함께 다뤄왔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1년 전, 그레이스 전 교수가 연세대에서 열린 특강에서 장애인 의복 디자인과 오픈 스타일 랩의 활동을 소개하는 모습. 그는 장애인의 몸과 일상을 고려한 의복 디자인을 통해 패션과 접근성, 존엄의 문제를 함께 다뤄왔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시차가 만든 작은 해프닝

미국에서 둘째 날이다. 조금 느긋하게 자고 일어나 오전 11시에 UGA(University of Georgia, Athens) 디자인학과 교수인 그레이스 전과 점심 약속이 있었다. 호텔 스타벅스에서 잉글리시 머핀과 커피로 조식을 하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11시가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호텔 레스토랑에도 없었다.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보니, 이런! 약속 장소인 더 채스틴 레스토랑(The Chastain Restaurant)은 호텔 안 식당이 아니라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별도의 식당이었다.

한국과 애틀랜타의 시차는 13시간이다. 13시간을 비행하고 도착했는데도 여전히 인천에서 출발했던 시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어제 하루를 24시간+ 13시간을 보냈다. 평소 시차 멀미를 심하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머리가 멍해져 착각한 것이다.

내가 “지금이라도 택시를 잡아 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자, 그레이스 전 교수는 오히려 자신이 호텔로 오겠다고 답했다. 작은 해프닝 끝에 우리는 호텔 안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이었지만, 점심 메뉴는 우리 눈에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정도로 보였다. 그렇게 예정에 없던 호텔 점심을 함께하며 반가운 만남을 이어갔다.

장애인의 몸을 위한 의복 디자인

오픈 스타일 랩 워크숍 참가자들이 장애인 의복 디자인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픈 스타일 랩은 장애인 당사자와 디자이너, 학생들이 협업해 개인의 몸과 생활에 맞는 의복을 설계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오픈 스타일 랩 홈페이지 갈무리(김종배 제공)
오픈 스타일 랩 워크숍 참가자들이 장애인 의복 디자인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픈 스타일 랩은 장애인 당사자와 디자이너, 학생들이 협업해 개인의 몸과 생활에 맞는 의복을 설계하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사진=오픈 스타일 랩 홈페이지 갈무리(김종배 제공)

그레이스 전 교수는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에서 시작한 장애인 의복 디자인 비영리법인 ‘오픈 스타일 랩(Open Style Lab)’의 CEO로 활동하고 있다. 5년 전쯤 내가 한국에서 여성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장애인 의복을 개발할 때 칭화대 정지홍 교수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이후 겨울 워크숍에 온라인으로 참여하거나 한국에 초청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지금은 UGA 디자인학과로 옮겨 최근 테뉴어, 즉 정년보장 교수가 되었으며, 장애인과 학생들이 함께 워크숍 형태로 개개인에게 맞는 의복을 디자인하는 작업에 집중해왔다.

오픈 스타일 랩의 활동은 포브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언론에도 소개되었다. 미국 프로농구 NBA의 뉴욕 Knicks 팀이 홈경기 하프타임에 맨하탄에서 농구경기 같이 치열하게 노력하는 기업인에게 수상하는 ‘Make It Awards’ 시상식에서 3만달러 수표를 수여 받는 등, 장애인을 위한 오픈스타일랩의 열정적 활동이 크게 평가받으며 많은 기업과 기관들로 부터 주목과 지원을 받아왔다.

나 역시 의복 문제를 매일 겪는다. 40년 동안 종일 앉아서 생활하고 운동을 할 수 없으니 팔다리는 말랐지만 배는 많이 나왔다. 힘을 쓸 수 있는 곳은 목과 어깨, 이두박근 정도다. 그래서 상의는 큰 사이즈가 필요해 주로 미국 제품을 사 입고, 긴 팔은 한두 번 접어 입는다. 정장 상의나 코트는 뒷부분이 휠체어 등판 아래로 내려갈 수 없어, 기성복을 사면 뒤 하단을 잘라내거나 등 중앙부터 아래까지 갈라 당겨지지 않게 수선해 입는다.

최근 아내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수입 양복 상의를 휠체어 앉은 자세에 맞춰 수선한 모습. 오래 앉아 생활하는 신체 조건에 맞추기 위해 양복 뒤 하단 폭을 38cm 늘렸고, 원단값과 임가공비를 포함해 수선비만 15만 원이 들었다. 장애인 의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몸의 조건과 이동 방식을 고려한 기능적 디자인이어야 한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최근 아내에게 생일선물로 받은 수입 양복 상의를 휠체어 앉은 자세에 맞춰 수선한 모습. 오래 앉아 생활하는 신체 조건에 맞추기 위해 양복 뒤 하단 폭을 38cm 늘렸고, 원단값과 임가공비를 포함해 수선비만 15만 원이 들었다. 장애인 의복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몸의 조건과 이동 방식을 고려한 기능적 디자인이어야 한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전신이 마비되어 복부에 힘을 줄 수 없고, 항상 앉아 있으며 엉덩이를 들 수도 없으니 복부는 물풍선처럼 된다. 바지는 허리둘레가 42인치를 넘어간다. 한국 브랜드는 맞는 사이즈가 없어 수선해 입거나 미국에 갈 때 큰 사이즈를 사서 입는다.

척수손상 장애인은 방광 관리를 위해 카테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처럼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지마비 장애인은 카테터를 방광에 삽입해 고정하고 바지 속 다리에 착용한 소변 백에 연결한다. 그래서 요로감염 위험이 있는 카테터 작업을 조금이라도 쉽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 바지의 지퍼를 더 깊고 길게 내리는 등 의복의 기능 보완이 필요하다.

이처럼 휠체어 장애인에게 옷을 입는 일 자체도 하나의 도전이다. 복지 선진국에서는 정부가 특수 제작된 의복 구매를 보조해주고, 자연스럽게 장애인 의복 전문 회사도  많이 형성되어 있다.

옷은 패션이자 보조기기다

여성 휠체어 사용자의 앉은 자세를 고려해 개발한 장애인 의복 디자인 자료. 3D CLO 프로그램을 활용해 가상 착의를 시뮬레이션하고, 실제 착의 과정을 통해 허리선과 상의 길이, 활동성을 검토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여성 휠체어 사용자의 앉은 자세를 고려해 개발한 장애인 의복 디자인 자료. 3D CLO 프로그램을 활용해 가상 착의를 시뮬레이션하고, 실제 착의 과정을 통해 허리선과 상의 길이, 활동성을 검토했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나는 그동안은 기성복 바지를 사서 옷 수선집에서 수선해서 입었었다. 그러다가 독일 장애인보조기기 전시회에서 장애인 의복 전문 회사를 알게 된 뒤, 그 전시회에 갈 때마다 한두 벌씩 사서 1년 내내 그것들만 입게 되었다.

그래서 장애인보조기기 개발사업에 신청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여성장애인의 생애주기별 보조기기 3종을 개발했다.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 생활을 해야 하는 여성 휠체어 장애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정장과 캐주얼복을 개발했다.

바지의 엉덩이 부분은 뒤를 더 높고 넉넉하게 만들고, 앞쪽 지퍼는 더 깊게 내려가도록 했다. 상의는 휠체어 바퀴를 밀 때 어깨가 편하도록 하면서도 맵시가 제한되지 않게 했다. 이 분야 연구를 오래 해온 인제대 박광애 교수님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고, 그레이스 전 교수를 초청해 세미나와 자문도 받았다.

우리 팀은 정장을 포함한 다양한 디자인을 개발했지만 상용화는 쉽지 않았다. 특히 청바지부터 시도하려 했으나 국내에서는 생산 기반이 거의 사라졌고, 중국 공장에서 물량을 뽑으려면 최소 몇 천 벌은 주문해야 했다. 현재는 장애인고용공단의 지원사업과 연계해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상용화에 참여할 선한 기업을 찾고 있다.

최근 미국의 타깃(Target)이나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는 일반 의복에도 이런 기능을 일부 적용하고 있다. 장애인에게 편하면서도 일반인에게도 자연스러운 디자인,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이른바 유니버설 디자인 철학이 조금씩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한 여성 패션 회사는 휠체어에 앉은 여성 마네킹을 전시장에 배치하며, 장애인도 일반 패션의 범주 안에 포함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남부의 환대, 그리고 디자인의 진심

애틀랜타 더 채스틴 레스토랑의 식재료 정원. 이곳에서는 셰프와 정원사가 바질, 허브, 채소 등을 직접 재배해 음식 재료로 사용하며, 미국 남부의 환대 문화를 현대적으로 보여준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애틀랜타 더 채스틴 레스토랑의 식재료 정원. 이곳에서는 셰프와 정원사가 바질, 허브, 채소 등을 직접 재배해 음식 재료로 사용하며, 미국 남부의 환대 문화를 현대적으로 보여준다. 사진=김종배 교수 제공

그레이스 전 교수는 애틀랜타의 독특한 풍습을 보여주려고 그곳의 특별한 식당 ‘더 채스틴’에서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하려고 했다. 그 식당은 뒤편에 식용채소정원(Culinary Garden)을 갖추고 있으며, 셰프와 상주 정원사가 직접 바질, 고추, 가지, 호박, 허브류 등을 친환경 재생 농업 방식으로 재배해 음식 재료로 사용하는 이른바 '미슐랭 그린스타 레스토랑'이다.

이 정원은 미국 남부의 ‘정성껏 직접 길러 대접하는 환대(Hospitality) 문화’를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는 각 집에서 먹을 식재료를 직접 재배하고, 때로는 ‘호그 킬링(Hog Killing)’이나 ‘부쉐리(Boucherie)’라 불리는 전통적 축산과 나눔의 문화도 남아 있다.

그레이스 전 교수의 남편은 안과의사인데, 최근 진료해준 환자로부터 감사의 뜻으로 직접 키운 살아 있는 닭을 선물하겠다는 말을 듣고 정중히 고사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에피소드도 들려줬다. 귀한 손님에게 직접 키운 가축을 살아 있는 상태로 선물하는 것은 깊은 존경과 환대의 표시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남부 특유의 웅장한 환대(Hospitality) 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풍습이라고 한다.

그레이스 전 교수는 1년 전 한국을 방문해 우리 학교에서 특강을 하고, 자신의 저서 『패션, 장애, 협업디자인』 20여 권을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당시 나는 그를 학교 근처 단골식당 ‘대추나무 막국수’로 안내해 막국수와 감자전 등을 대접했다. 작은 한옥 식당의 가운데 뜰에서 식사하는 동안 제비가 처마 밑 둥지를 드나들며 손님들 위로 날아다녔고, 그레이스 전 교수는 그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식후 커피를 마신 뒤 그레이스 전 교수는 유모에게 맡기고 온 아기의 수유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떠나며 원래 가려 했던 더 채스틴의 유명한 빵이라며 크루아상이 든 봉지를 건넸다. “It’s different!” 특별한 맛이었다. 그 빵 속에도 그가 말한 환대가 느껴졌다.

미국에서 태어난 이민 2세대인 그레이스 전 교수는 활달하고 유쾌하다. 영어에 아버지에게서 배운 경상도 사투리 한국말을 섞어 말하는데, 요즘은 듣기 힘든 옛 경상도 사투리를 미국에서 듣는 기분은 묘하고도 반가웠다.

그레이스가 특별한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하려 한 마음에서 손님을 환대하려는 그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 진정성이 디자인을 하면서도 장애인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그의 활동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받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