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읍성의 성문누각과 내벽의 모습경주는 흔히 ‘천년고도’라고 불린다. 그러나 경주의 역사를 신라 천년에만 가두어 보는 것은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의 절반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가 멸망한 뒤에도 경주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도시로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조선시대 경주는 종2품의 고위 지방관인 부윤이 다스리던 매우 큰 고을이었다.
신라시대 경주의 중심을 월성이 상징한다면, 신라 이후 경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재도 많다. 동락당, 양동마을, 경주향교, 최부자댁 등 매우 많다. 복원 중인 경주읍성도 빼놓을 수 없다.
경주읍성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문종실록'에는 1451년 당시 성의 둘레가 4,075척(약 1.9㎞)에 이르렀으며 높이도 약 5.4m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에게 성을 빼앗겼다가 신무기인 비격진천뢰 등을 활용하여 탈환했다는 역사도 전해진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읍성의 대부분은 사라졌다. 근대화와 도시개발 과정에서 성벽과 성문이 훼손되고 철거되어 한동안 동쪽 성벽 일부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경주시는 이렇게 사라진 읍성을 장기간에 걸쳐 복원하고 있다. 동성벽과 동문인 향일문 등이 이미 복원되었고, 지금도 발굴과 복원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하나씩 찾아 옛 모습을 되살린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성곽을 제대로 보고 체험하려면 성문 누각에도 올라가 보고 성곽 위를 직접 걸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성벽을 아래에서 바라보는 것과 성곽 위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그런데 현재 복원된 경주읍성의 성문 누각이나 성곽길로 올라가려면 성문누각 좌우에 설치된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 휠체어나 유아차가 올라갈 수 있는 접근로를 찾기 어렵다. 결국 계단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곽 위에 올라가 직접 체험할 수 있지만,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을 비롯한 일부 이동약자는 성벽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으로 관람을 끝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도 생긴다. 읍성이 실제 군사시설로 사용되던 시대에도 성곽 위는 중요한 전투공간이었다. 대포나 화차, 군수물자처럼 무겁고 바퀴가 달린 장비를 높은 성벽 위로 옮겨야 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계단 이외에 물자나 장비를 이동시키는 경사로 등 어떤 방식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복원 과정에서 이런 역사적 가능성까지 충분히 조사한다면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접근성을 높일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부가 복원된 경주읍성의 성곽길과 내벽
경주읍성 성문누각 2층 내부 모습과 단차에 가로막힌 내부 출입구
복원 중인 경주읍성 외벽의 모습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문화재를 왜 복원하느냐는 것이다.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여 성곽과 성문을 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하는 데에는 시민과 관광객들이 찾아와 보고, 걷고, 체험하도록 하려는 목적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누군가는 성곽 위를 걸으며 역사를 체험하고 누군가는 계단 아래에서 그 모습을 올려다보기만 해야 한다면, 같은 문화유산을 보고도 경험할 수 있는 역사의 크기는 달라지고 불공평한 차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사람만을 전제로 문화재를 복원한다면 그것은 21세기의 공공시설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장애인뿐 아니라 무릎이 약한 노인, 유아차 이용자까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유니버설디자인의 기본 철학이다.
좋은 사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원화성이다. 조선 정조때 축조되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곽과 시설 가운데 상당 부분은 훼손된 것을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역사 기록에 나타난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복원했다하여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면서도 수원화성의 성곽 내벽에는 여러 곳에 완만한 경사형 접근로가 있다. 휠체어나 유아차를 이용하는 사람도 가능한 구간에서는 성곽 위로 접근할 수 있다. 물론 화성 전체 구간이 완전히 무장애 공간인 것은 아니다. 지형의 특성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구간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능한 곳까지 최대한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을 깔고 있다.
경사로가 있다고 해서 수원화성의 역사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길은 장애인만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성곽길을 걷다 보면 노인이나 어린이, 유아차를 끄는 가족은 물론 비장애인들도 계단보다 완만한 언덕길을 더 편하게 이용한다. 장애인에게 편리한 시설은 비장애인에겐 더욱 편리한 법이다.
관광약자 접근성의 우수사례를 엿볼수 있는 수원화성의 모습(성곽길로 연결되는 내벽의 경사로-상단, 성밖에서 본 성벽-하단좌측, 성곽길을 이동하는 휠체어 장애인-하단우측)경주읍성은 보존 중인 원형 문화재가 아니다. 지금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다.
이미 모든 복원이 끝난 뒤 계단을 뜯어내고 경사로나 다른 접근시설을 추가하려면 문화재 경관과 구조를 훼손할 우려가 생기고 추가 비용도 들어간다. 그러나 복원계획 단계에서부터 문화재 전문가와 장애인 접근성 전문가, 건축가와 시민들이 함께 머리를 맞댄다면 역사적 원형을 존중하면서도 접근성을 높일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문화재 경관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수원화성처럼 최소한 몇 곳이라도 휠체어와 유아차가 성곽 위에 접근할 수 있는 동선을 마련하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다.
백 년 뒤 후손들이 지금의 경주읍성 복원을 평가한다면 무엇을 볼까. 돌을 얼마나 옛 모습과 똑같이 쌓았는지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간 우리가 문화유산을 누구와 함께 나누려고 했는지도 함께 평가할 것이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노인이든 어린이든 누구나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 역사를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복원은 완성된다. 경주읍성이 모든 사람에게 열린 문화유산으로 복원되기를 기대한다.
일부가 복원된 경주읍성 외벽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