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수목원의 독특한 문패와 수목원 초입의 모습 ⓒ소셜포커스율곡수목원은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리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율곡은 1536년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파주로 이주해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관직에 오르기 전과 벼슬에서 물러난 시기, 그리고 말년에 이르기까지 파주 장단을 학문과 사색의 거점으로 삼았다. 말년에는 건강 악화와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이곳에서 저술과 후학 양성에 힘쓰다 1584년 생을 마쳤다.
강릉이 율곡의 ‘탄생지’라면, 파주는 그의 사상과 인품이 성숙한 ‘성숙지’라 할 수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세워진 율곡수목원은 자연과 인물의 숨결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휠체어를 타고 율곡수목원을 찾아 나섰다. 8월 초의 파주 율곡수목원은 여름의 마지막 기운을 품고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무수국 등 시들어가는 꽃송이들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향기를 풍긴다.
뜰 한쪽을 채우고 있는 무스카리 아르메니아쿰(무스카리 또는 포도히아신스라 함)도 눈길을 붙잡는다. 봄에 절정을 이루던 보랏빛 꽃들이 이제는 시들어가고 있었지만, 그 모습마저도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전하는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꽃잎 끝이 옅게 바래가며 남긴 색채는, 시간의 흔적이었다.
수목원의 중심부를 향해 걷다 보면 황금회화나무가 줄을 서 있다. 황금빛 잎사귀가 무성하게 드리운 나무 아래는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도 잠시 비켜 간 듯 그늘이 깊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혀 내는 소리는 작은 종들이 속삭이는 듯 맑고 경쾌했다.
길가에는 여전히 다양한 여름꽃들이 남아 있었다. 루드베키아 군락은 뜨거운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많은 송이의 꽃들이 고개를 내민다. 까맣게 솟아오른 꽃심 위로 원을 그리듯 펼쳐진 노란 꽃잎은 한순간 시선을 붙잡는다. 검은 눈동자처럼 보이는 중심부와 태양을 닮은 꽃잎이 어우러져, 굳건함과 희망을 동시에 상징하는 듯하다.
그늘진 길목에 자리한 비비추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넓은 잎은 짙은 초록 위에 흰색과 노란색 무늬가 섞여 있어, 꽃이 피지 않아도 이미 하나의 그림 같다. 곳곳의 줄기 끝에 피어나는 보랏빛 나팔 모양의 꽃의 모습이 은근하고 단아하다.
파주 율곡수목원은 사계절 내내 각기 다른 얼굴을 보여주지만, 8월의 수목원은 특히나 ‘이제 곧 떠날 여름’을 느끼게 한다. 한창 피어오른 꽃과 서서히 물러나는 꽃, 무성한 잎사귀와 그 사이에 스며든 황금빛이 모든 것이 계절의 끝자락을 장식한다.
시들어가는 봄꽃과 피어나는 여름꽃이 계절의 흐름을 알려준다. ⓒ소셜포커스
방문자센터 건물과 안개를 뿌려주는 수목원 초입의 풍경 ⓒ소셜포커스수목원의 핵심은 21개 테마별 식물 주제원이다. 사계절 정원에서는 계절마다 다른 얼굴의 꽃이 반겨주고, 침엽수원에서는 고즈넉한 숲 향기가 감돈다. 암석원과 유실수원, 사임당 숲은 자연의 다양성과 생명력을 체험하게 한다. 이곳에는 무려 1,300여 종, 30만 본의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시민이 기증한 나무도 함께 뿌리내리고 있다. 단순한 전시가 아니라, 모두가 돌보고 가꾸는 숲이다.
수목원에는 약 5km의 둘레길이 펼쳐져 있다. 도토길이라고 하는데 주차장에서 구도장원길 – 줄바위길 - 임진강 낙조전망대 – 문바위 – 코스모스조망대 – 솔향기길 – 병풍바위길 – 전망대를 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오는 길이다. 전망대에서는 임진강과 송악산을 품은 풍경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다만 전망대 등 일부 구간은 군사보호지역에 포함되어 있어 훈련 등 작전기간에는 출입이 통제되기도 한다.
구도장원길은 이 수목원만의 특별한 길이다. 아홉 단계의 과거시험을 모두 수석으로 합격한 조선의 천재 유학자, 율곡 이이를 기리는 길이다. 나도밤나무길, 자경문길, 격몽요결길, 십만양병길, 삼현수간길로 이어지는 2.7km의 길은, 율곡 이이의 삶과 학문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전해준다. 길을 걷다 보면 단순한 산책을 넘어, 조선의 대학자가 남긴 가르침과 오늘의 우리가 마주하는 과제를 함께 성찰하게 된다.
수목원 안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푸른 잔디광장이 펼쳐졌다. 넓게 트인 하늘 아래, 자연스럽게 배치된 벤치들과 그늘 쉼터는 누구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휠체어로 움직이기 편하도록 곳곳에 나무 데크길과 평평한 보행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산책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은 테마 정원으로 연결된다. 다양한 자생식물이 계절마다 표정을 바꾸며 그 길을 수놓는다. 나는 휠체어 위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과 바람, 그리고 휠체어에 앉은 채 자연과 나란히 걷는 이 감각은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였다.
수목원 중간에는 작은 연못과 정자가 있는 율곡정원이 나온다. 이곳은 조선시대 정원의 멋을 재현한 공간으로, 고풍스러운 나무기둥과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정자는 마치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준다. 고요함 속에서 들리는 물소리와 바람소리는 내 마음을 정화시키기에 충분했다.
율곡수목원에서는 두 가지의 대표적인 숲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유아숲체험 프로그램과 80대까지 참여 가능한 산림치유프로그램(치유숲, 가족숲, 엄마활력숲, 실버숲, 노르딕 워킹)이다.
수목원 내부 각 주제원의 모습 ⓒ소셜포커스
봄, 여름, 가을의 수목원 (사진=파주시)이곳은 단순히 걸음을 걷는 것이 아닌, 자연을 통한 심신 회복을 목적으로 설계된 공간이다. 도시의 미세먼지 대신 흙과 나무의 냄새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고, 내내 긴장되어 있던 어깨와 등줄기가 자연스레 풀어졌다. 숲은, 장애와 비장애, 나이와 신체 조건을 구분하지 않았다. 모두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간, 바로 그것이 자연의 힘이 아닐까?
수목원은 휠체어나 유아차 등도 탐방로 대부분의 구간에 출입이 가능할 만큼 무장애 공간을 잘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가파른 언덕길에 안전 펜스 등이 설치되지 않아 휠체어나 유아차가 이동하기에는 위험한 곳이 더러 있으며, 통행로 중간이나 갈림길의 단차, 계단 등으로 휠체어 등의 이동이 불가능한 곳도 자주 눈에 띄었다. 개선이 필요한 이런 시설들은 사진 설명으로 대신한다.
이 수목원은 계단 구조의 통행로가 많은 편이다. 지형의 고도차가 심하여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계단을 최대한 줄이고, 통행로를 길게 우회하더라도 누구나 불편없는 산책로를 확대해야 한다. 계단보다는 완만한 경사형 보행로가 많을수록 오히려 우수한 환경으로 평가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초고령 사회일수록 노인들의 관광 및 힐링 수요가 많다. 계단이 많을수록 노인들의 무릎 건강에는 독이 될 것이다. 또한 유아차를 휴대하거나 노부모를 모시고 다니기도 어렵다. 건강 친화적이고 가족 친화적인 환경이 더욱 필요한 이유다.
휠체어나 유아차 등의 통행을 어렵게 하는 단차 및 계단 ⓒ소셜포커스
휠체어 등의 안전한 통행을 위해 팬스가 필요해 보이는 가파른 언덕길 ⓒ소셜포커스
수목원 내 많은 계단은 관광약자의 통행을 어렵게 한다. ⓒ소셜포커스
휠체어 통행이 가능한 수평 산책로가 있음에도 입구의 계단 2개가 막아서는 모습 ⓒ소셜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