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 명소 탐방기 [33] - 원효와 요석공주, 설총을 찾아 나선 경주 여행 ①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연이 깃든 경주 월정교의 화려한 야경(사진=경주시 제공 관광영상자원이미지)한국의 고대사에서 원효대사(617~686)와 그의 아들 설총은 불교와 유학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지식의 대중화'와 '한국적 사상의 정립'이라는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이 두 부자의 업적은 단순히 종교나 학문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인의 사고방식과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이때는 신라의 삼국통일 직후 신라문화의 황금기이기도 했다.
원효는 의상과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해골물 깨달음'을 통해 유학을 포기하고 혼자 돌아와서 일심(一心) 사상으로 한국 불교의 독자적 경지를 열었다. 그가 외쳤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10가지 문제에 대한 다툼을 화합으로 이끈다)은 한국불교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이는 종교적 이념을 넘어 신분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는 철학적 기반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저잣거리에서 경전을 읽을 수 없던 민중들과 춤을 추며 파계를 일삼는 '무애행(無碍行)'을 통해 귀족 위주의 불교를 대중화시켰고,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그의 방대한 저술은 당대 중국과 일본의 승려들이 교본으로 삼을 만큼 국제적인 경지에 도달했다. 특히 일본 교토 국립박물관에 소장 중인 원효대사의 진영과 원효와 의상의 일대기를 그린 ‘화엄종종사회전’이라는 그림이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받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원효대사의 위상을 짐작해볼 수 있다.
설총은 아버지 원효가 열어놓은 사상적 자유를 바탕으로, 신라 사회의 도덕적 기틀을 닦고 이두를 집대성하여 우리말 표기법을 체계화했다. 이는 한문을 모르는 이들도 행정 문서나 신라의 노래인 '향가'를 기록할 수 있게 한 혁신적인 업적이며,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우리 민족의 언어생활을 지탱했다.
또한 꽃의 왕(모란)에게 간언하는 할미꽃의 이야기를 담은 화왕계(花王戒)를 국왕에게 지어 바침으로써 임금은 화려한 유혹이 아니라 진실한 충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유교적 정치 윤리를 확립했다.
한문으로 된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풀이하여 가르침으로써, 신라에 유학이 학문으로서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설총은 동국유종(東國儒宗; 우리나라 유학의 종장)이라고 불리는 신라 말기의 대학자 최치원보다 2세기나 앞선 시대의 인물이다.
유교의 성전인 각 향교의 문묘에는 성현으로 일컫는 유학자 18현(신라·고려 각 2인, 조선 14인)이 배향되어 있는데, 이중 설총이 가장 앞선 시대의 인물이다.
일본 교토 고산사의 국립박물관에 소장중인 원효대사의 가장 오래된 영정, 효창공원의 원효대사 동상, 원효대사의 표준영정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가 시작된 경주 월정교의 모습지난 4월 하순, 원효와 요석공주, 설총의 흔적을 찾아 경주 여행에 나섰다.
이번 경주여행에는 경주장애인관광도우미센터에서 휠체어 탑승용 차량과 운전기사, 문화해설사를 지원해준 덕분에 매우 알차고 뜻깊은 여행이 되었다. 이 센터는 경북지체장애인협회 경주지회(지회장 김태열)가 운영하고 있으며, 본지 2021년 10월 12일자에서 “장애인 관광의 으뜸 길잡이, 경주장애인관광도우미센터”라는 제목으로 자세하게 소개한 적이 있다.
먼저 교동에 소재한 월정교로 갔다. 남천(옛이름 문천)의 맑은 물 위로 솟아오른 월정교(月精橋)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다리 위에 기와지붕이 있는 누각 형태로 지어졌다.
월정교에서 동북방향을 바라보면 왕궁터가 있는 월성이다. 월성 주변의 일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역사유적월성지구에 해당한다. 월정지구에는 동궁과월지(구 안압지), 첨성대, 석빙고, 내물왕릉, 계림 등이 모여있다.
월정교는 왕궁인 월성과 개천 건너 남쪽의 남산(불국토의 상징)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이자 관문 역할을 했다. 왕궁과 남쪽 외곽을 잇는 가장 격조 높은 다리였으며, 당시 신라의 토목 기술이 집약된 기반 시설이었을 것이다.
월정교는 일반적인 돌다리가 아니라, 다리 위에 지붕과 누각이 있는 누교(樓橋) 형태다. 당시 신라의 경제적 번영과 화려한 문화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을 것이다.
창건 당시의 시설물은 조선 시대에 유실되어 석조 기단만 남아 있었으나, 1984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와 고증을 거쳐 2018년 4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했다.
양 끝에는 웅장한 2층 문루가 세워져 있어 마치 궁궐 건축물을 보는 듯한 위엄을 자랑한다. 붉은색과 푸른색의 화려한 단청이 푸른 하늘, 남천의 맑은 물과 어우러져 한국적인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이 다리와 문루를 비추고, 남천의 물결 위로 다리의 형상이 그대로 투영되어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다리 앞에는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다리 전체를 조망하며 사진을 찍기에 최적의 장소다. 월정교 문루 2층 전시관에서는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과 복원 과정을 담은 영상도 관람할 수 있으나, 휠체어 등을 이용하는 관광약자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불과 8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인데 전시관에 관광약자의 접근성이 고려되지 않은 점이 매우 아쉽다.
월정교가 가로놓인 개천의 양쪽 제방에 설치된 산책로 또한 하필이면 요철이 심한 형태로 노면을 시공해놓은 바람에 휠체어나 유아차, 실버카 등을 이용하는 관광약자에게는이동에 큰 불편을 준다.
월정교 입구, 왼쪽 숲은 월성을 둘러싼 숲이다.
월정교 문루에서 본 교각 위의 내부 모습
월정교 내부에서 외부로 본 풍경
노면의 요철현상이 휠체어 등 관광약자 이동보조장치의 통행을 방해하는 월정교 주변의 탐방로는 개선이 필요하다.필자는 월정교를 건너면서 화려한 목조 교량의 난간에 기대어, 삼국유사에 전하는 약 1,300년 전 누더기 스님의 기이한 외침을 떠올렸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누더기를 걸친 채 저잣거리를 누비던 파계승 원효. 그의 '무애가(無碍歌)' 속에 담긴 도발적인 청혼을 알아챈 사람은 무열왕 김춘추였다. '자루 없는 도끼'는 과부를 의미하고, '하늘을 받칠 기둥'은 나라를 지탱할 훌륭한 인재(아들)를 낳겠다는 뜻임을 간파한 것이다.
무열왕은 전장에서 남편을 잃고 요석궁에 홀로 지내던 자신의 둘째 딸 요석공주를 떠올렸다. 곧 관리를 시켜 원효를 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관리가 원효를 찾아가자 이미 왕의 의도를 알아차린 원효는 문천 위의 다리를 건너면서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흠뻑 적셨다.
옷이 젖은 원효를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했다. 신라판 '로맨틱 러브스토리'의 서막이자, 한국 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설총이 잉태되는 순간이었다. 물에 젖은 옷은 벗겨졌고, 대신 사랑의 온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월정교의 붉은 단청이 유독 짙게 보이는 것은 당시 두 사람의 뜨거웠던 인연 때문일지도 모른다.
원효와 사흘 밤낮을 함께 보낸 요석공주는 그가 떠난 뒤 홀로 아이를 품었다. 그 아이가 바로 고대 우리말을 표기할 이두를 집대성한 위대한 언어학자이자 한국 유학의 시조에 해당하는 설총이라는 인물이다.
문천은 형상강의 지류인 지금의 남천을 말하며, 월정교는 원효 이후 시대인 경덕왕 때 생겼으니 원효는 문천에서 궁궐과 가까운 지점에 설치된 월정교 이전의 다리에서 빠졌을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그 다리가 문천교(蚊川橋)이고 유교(楡橋)로도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월정교 옆의 제방길에 서 있는 ”원효가 다녀간, 그 길 위에 서다“라는 안내용 구조물에는 원효대사 일대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가 새겨져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원효와 요석공주의 흔적을 음미해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 원문과 해석자료
월정교 교각의 내부모습
월정교의 남쪽 문루
월정교 교각 2층 내부의 유물 전시공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그리고 설총의 탄생 배경을 소개한 안내표지판, 월정교 앞에 세워져 있다.월정교를 건너면 고즈넉한 교동마을이 펼쳐진다. 교동마을은 궁궐터가 있는 월성과 인접한 지역인 점으로 보면 귀족들의 거주 지역이거나 궁성에 부수되는 관청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교동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그 동네에 무슨 기관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전국 어디서나 교동이니 교촌이니 하는 마을엔 의례 향교라는 옛날 교육기관이 있기 마련이다. 경주 교동도 마찬가지다. 그곳에 경주향교가 있다. 경주향교는 조선시대 설치된 그냥 향교가 아니다.
이곳에 신라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있었고, 고려시대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하던 시기에는 학리등사(學理等寺)라는 학문과 관련된 기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유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지방교육기관인 향교로 이어진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이곳에 요석궁이 있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러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보면 무열왕때(654~661) 있었던 요석궁터에 신문왕때(681~692) 이르러 국학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무열왕때 이곳에서 원효와 요석공주가 만났고, 무열왕의 손자인 신문왕 때는 설총이 학자로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다.
* 필자가 원효와 요석공주, 그리고 설총의 흔적을 찾아 나선 경주 여행은 월정교에서 시작하여 교동마을, 분황사, 설총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진다. 교동마을에서부터 나머지 구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마무리할 예정이다.
월정교 인접 교동마을의 골목풍경